패션 디자인을 공부하는 학생으로서 또한 회사의 코디네이터로서 분주한 나날을 보내는 가운데 우리의 사랑은 결실을 맺었다. 이즈음 나는 상당 기간 공들여 운영하던 홍대 앞 I.B 화실을 정리했다. 우리는 1982년 11월 처의 모교인 이화여대 캠퍼스의 교회 예배당에서 조촐한 결혼식을 올리고 당시 흙먼지 날리며 아파트 신축공사가 한창이던 개포동 7단지 주공아파트에 작은 보금자리를 마련했다.

나의 아내 신영진은 당시 제일모직의 까샤렐 팀에 디자이너였다. 우리는 맞벌이 신혼부부이면서 함께 대학원에 다니는 남들이 부러워하는 패션 커플이 되었다. 당시 국내에서는 매우 희귀한 직종 이었던 코디네이터라는 일의 특성때문에 KBS, MBC 등 TV 방송에서 출연 요청이 들어왔고 주부들의 시청률이 높은 아침 10시 방송프로에 출연해 여성의 피부미용 요령과 효과적인 메이크업 방법 그리고 이에 매치되는 패션 연출 등에 관해 시연 방송을 하곤 했다.

회사에선 홍보 차원에서 적극적으로 출연을 권장했고 때론 저녁시간 때의 예능 오락 프로에 출연하여 아주 희한한 이 직업의 특성에 대해 방송하기도 했다. TV 보급률도 지금처럼 높지 않았고 컬러 TV 방송을 이제막 시작했던 1982년 당시에도 방송 매체의 힘은 참으로 대단하여 잠깐씩 출연한 나를 알아보는 사람들도 생겼고 미용과 패션에 대해 궁금한 점들을 물어 오곤 했다.

대학원의 패션 공부와 병행하여 이제 3년 차 실무경력의 코디네이터로 접어들면서 나의 패션에 대한 안목은 더 크게 열려가고 있었다. 이즈음 아모레퍼시픽에서는 세계적 톱 브랜드인 일본의 시세이도를 능가할 만한 메이크업 제품 ‘나그랑’ 브랜드 출시를 야심 차게 기획하고 있었다.

물밑으로는 깜짝 놀랄 만한 한국 최고 미모의 전속 모델을 수배중이었으므로 내가 이끄는 미용연구 1 과는 연일 늘어가는 테스트 모델의 메이크업과 촬영 작업으로 매우 바쁘게 돌아갔다. 각 방송사의 드라마나 연예오락 프로의 신입 탤런트 수십여 명의 테스트 촬영 결과를 관련 부서장들과 이사들이 함께 모인 회의실에서 큰 화면에 슬라이드로 비추어 살펴보고 전속모델 여부를 결정하는 과정이어서 카메라맨과 메이크업 담당자들의 작업은 결과에 중요한 역할을 하게 마련이었다.

그러나 이런 모든 과정을 무색하게 할 정도의 출중한 미모를 지닌 한 여인이 등장하게 되는데 그녀가 바로 황신혜였다. 인천 인일여고 출신의 앳된 19세의 황신혜는 이듬해인 1983년 아모레퍼시픽 나그랑 브랜드의 전속모델로 MBC 신인 탤런트로 세상에 아름다운 그녀의 첫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

한편 내 패션 세상의 멘토이며 스승이신 배천범 교수님과는 더욱 친분이 두터워져서 국민대학교 교수님의 연구실과 정릉 댁으로도 찾아 뵈며 나의 개인적 진로나 회사에서 일어나는 일 등에 대해서 의논 드리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신규 메이크업 제품 출시에 관한 내 이야기를 듣고 계시던 배 교수님께서 뜻밖의 제안을 하셨는데 그것은 신제품 출시에 맞춰 대규모 메이크업 쇼를 해 보면 좋지 않겠냐는 것이었다.

회사로 돌아온 후 미용연구실장께 이러한 제안을 전했더니 조금은 의아해하면서도 관련 된 디테일한 예산과 행사 기획을 품의 서류로 작성하여 제출해 보라 하시며 관심을 보이는 것 이었다. 며칠간의 준비를 해 6하 원칙에 입각한 행사의 목적, 성격, 일시, 행사 장소 및 장소임 대비와 모델비 연출 관련 인건비 무대제작 등과 기타 소요경비 예산을 만들어 품의서를 올렸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적극적으로 행사를 준비하라는 사장님의 최종 지시가 내려왔는데 놀랍게도 우리의 예상을 초월하여 세배 정도 나 더 큰 규모의 예산이 책정되는 실로 슈퍼급 규모로 행사가 결정된 것이었다. 우리 부서의 모든 직원들이 동원되었고 총 연출은 배천범 교수께 맡겨졌다.

나는 조연출과 그래픽디자인, 메이크업 아티스트 3가지 역할을 함께 맡아 일을 진행하였다. 프리마돈나인 황신혜를 비롯한 당시 한국에서 활동 중인 최고의 패션모델 20여 명이 선발 되었고 4개월 여에 걸친 한국 초유의 대규모 메이크업 쇼 준비가 시작되었다. 배천범 교수님에 의해 음악담당 MBC PD 문웅희, 안무담당 무용가 김기인, 멀티비젼 컴퓨터그래픽 삼보컴퓨터, 소품 담당 방식 꽃 연구소 등 실험정신으로 충만한 인재들이 스카우트되어 팀이 꾸려졌고 쇼는 봄, 여름, 가을, 겨울 4개 무대의 파트로 구성 되어 준비되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미팅을 가졌던 배 교수께서는 내게 파트별 특징과 분위기 등 전반적 컨셉을 설명해 주신다. 그리고 즉석에서 특유의 빠른 필치로 스타일화를 그려 주시면 조연출인 나는 그 그림을 들고 의상실과 소품, 모자와 액세서리 제작 스튜디오를 직접 찾아다니며 설명하고 실물을 제작해 모델에게 피팅 하는 일을 진행하는 것이었다.

20여명 모델에 4개의 파트 총 80여 스타일의 의상과 다양한 소품의 실물이 제작되어야 했으니 하루 24시간이 부족할 정도로 발품 팔아 여기저기 돌아다니느라 정신이 없었다. 회사로 돌아오면 당시에는 전혀 생소했던 컴퓨터 그래픽 제작용 촬영과 작업이 기다리고 있었다.

1982년 당시엔 컴퓨터 체계에 윈도우가 등장하기 전으로 도스 상태에서 전문가가 일일이 암호 입력을 통해 프로그래밍을 해야 했다. 8 대의 중계기에 연결된 메인 컴퓨터는 중계기 한 대 당 3대의 특수 슬라이드 프로젝터가 제어되게 되어있어 프로그래밍에 따라 초당 24컷까지 슬라이드 필름을 연속 작동시켜 영화처럼 동영상구현이 가능한 당시로선 최첨단 대형 무대 배경용 영상 장치였다.

하지만 5,000여 장에 이르는 모든 컷을 촬영해 특수 슬라이드 마운트에 일일이 옮겨 끼워야하고 촬영된 슬라이드를 콘티에 맞게 트레이에 장착하는 작업은 시간이 너무 많이 소요되었다. 이런 번잡한 과정을 감수했던 이유는 최고의 메이크업 쇼 구현에 대한 열정이었다.

색상이 생명인 메이크업 쇼의 특수성을 감안할 때 슬라이드 필름의 색상 재현 효과가 다른 어느 장치보다 보다 뛰어났기 때문이었다. 슬라이드 작업 도중 저녁 9시 용산 본사의 중앙 난방이 꺼지고 참기 어렵게 추워지면 일거리를 싸 들고 직원들과 함께 신접살림을 꾸린 우리집으로 옮겨 철야 작업을 하고 다시 회사로 출근하곤 했다. 쇼 음악 담당 문웅희 PD 는 내 집에 있는음향기기를 사용하여 MBC 뮤직 라이브러리에서 들고 온 LP 판을 새벽까지 함께 들으며 음악을편집해 나갔다.

한편 모델들의 안무 리허설은 당시 실험정신으로 충만한 젊은 무용가 김 기인의 지도하에 강남 소재 태평양 여자 농구팀의 실내 연습장에서 한 달 이상 진행되고 있었고 쇼의 무대는 기존의 패션쇼 무대와는 차별되게 객석을 향해 돌출된 거대한 원형으로 디자인되어 자회사인 태평양 장치 사업소에서 제작되고 있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네 개 파트의 메이크업을 무대에서 직접 시연할 메이크업 아티스트는 미용연구 1과의 직원인 나와 김향숙, 박정훈, 김선자로 정해지고 백색 무대의상을 착용하도록 준비되었다.

총비용 1억 2,000만 원이 소요되는 전대미문의 슈퍼급 메이크업 토탈 패션쇼의 준비는 이렇게 D-데이를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1983년 당시 강남 개포동 30평 형 아파트의 분양가가 2,000만 원 안팎이고 대기업의 대졸 초임이 월 20만 원 정도였음을 감안할 때 당시의 행사 예산과 규모는 실로 엄청난 것이었다. 당연히 우리의 책임도 그만큼 막중할 수밖에 없었고 준비에 임하는모든 스태프 들의 심정은 비장하기까지 했다.

D-데이. 봄꽃의 기운 가득한 1983년 4월 18일 월요일. 드디어 몇 달간이나 밤낮없이 심혈을 기울여 준비한 쇼의 D 데이가 내일로 다가 왔다. 특별한 내일을 위해 눈 감아 잠을 청해보지만 잠은 오지 않고, 기도 반 걱정 반으로 밤새 누워 뒤척이다 보니 일상적인 날과는 아주 다른 날의 새벽이 하얗게 밝아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