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이너 루비나와 대화를 나누다 보면 허스키한 목소리와 당당한 말투 때문에 늘 중성적 이미지의 잔 다르크가 떠오른다. 무엇이든 자신의 맡은 일에는 100% 이상 에너지를 쏟는 냉철한 ‘투사’지만 엄마의 죽음 앞에서는 흐르는 눈물을 자제하지 못하는 휴머니스트다.
틀을 벗어난 자유로움, 인위적인 것과 대비되는 자연스러움, 그리고 흙과 숲, 나무 등 자연을 닮은 옷을 만들면서 대한민국 패션의 레전드 디자이너로 자리매김한 루비나 디자이너를 탐색해 본다.

인터뷰를 위해 찾아간 그녀의 아틀리에는 생각보다 조용했다. 마치 정중동의 느낌이 싸늘한 밤 안개가 그녀의 사무실 공간을 애워싸고 있었다. 냉철한 판단력과 열정적인 추진력 때문에 늘 차가운 인상을 주는 그녀를 닮은 모던한 사무실 공간에는 태풍 전야를 느끼게 하는 싸늘한 긴장감이 필자를 반기며 쿨한 환영의 미소를 날렸다.

디자이너 작업실의 널찍한 테이블에 마주 앉아 커피를 마시며 인터뷰는 시작했다. 이윽고 들려오는 그녀의 허스키한 목소리는 마치 오래된 지인을 만난 듯 익숙했다. 필자가 기자 초년생이던 90년대 초반 인터뷰를 한 이후 매 시즌 그녀의 컬렉션을 보면서 성장했기 때문에 생겨나는 익숙함일 것이다. 가끔 행사장에서 마주치게 되면 그저 말없이 기자의 어깨를 툭 치며 미소짓는 것이 그녀의 쿨한 인사법처럼 말이다.

올해 70대로 들어선 디자이너 루비나는 대한민국 패션계 최고의 완벽주의자다. 그만큼 스스로의 일에 최선을 다한다. 자신이 만족하지 못하면 결코 손을 내려놓는 일이 없다. 그것이 바로 ‘루비나 부티크’ 옷을 입는 단골 고객들의 자존감을 높이는 일이자 대한민국 레전드 디자이너의 품위를 지키는 일이라는 것을 그녀 스스로 잘 스스로 잘 알고 있다.

20세기 패션과 비교되는 21세기 패션의 화두는 바로 ‘헤리티지 (Heritage)’ 즉 유산이다. 20세기가 패션을 만들었다면, 21세기는 그 유산을 조합하고 맞추어 가는 숨은그림찾기다. 패션은 익숙함으로 인해 소비자들로부터 호응을 얻는다. 어쩌면 21세기의 한국 패션에는 20세기 후반 부터 한국의 디자이너들이 만들어 놓은 헤리티지의 틀 안에서 움직이고 있다.

패션의 변방 패션 코리아에서 패션의 주변국으로 올라서기까지 수많은 레전드 디자이너들의 땀과 열정이 아로새겨진 판 위에 젊은 디자이너들은 진화된 패션 지도를 그려간다. 디자이너 루비나가 전성기를 달리던 90년대 화두는 ‘패션이냐 예술이냐’의 문제였다. 대중적인 커머셜 패션과 예술적인 판타지 패션 사이의 간극이 컸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시 레전드 디자이너들은 타협보다는 모험을, 안정보다는 혁신을 추구했다.

이제 21세기의 대한민국 후배 디자이너들은 레전드 디자이너들의 유산을 탐구하고 고찰해 컨템포러리 패션으로 변주해야 한다. 디자인 영감을 바다 건너 해외 디자이너들에게 의존하기보다는 이제 K-패션에서 그 정체성을 찾아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패션 코리아의 레전드 디자이너들의 아카이브를 탐구하는 것은 선택이 아닌 필수다. 최근 세계적인 주목을받고 있는 아이돌 그룹 BTS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결국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다. 외국인들이 한국말로 된 노래를 흥얼거리는 시절이 도래했기 때문이다.

모델 겸 가수, 배우에서 패션 디자이너로 변신
디자이너 루비나는 전남 순천 출신이다. 순천여중을 졸업하고 중학교 때부터 고전 무용을 익혀 서울예고를 거쳐 숙명여대 무용학과를 졸업했다.

하지만 고등학교 시절 ‘여학생’ 촬영을 위해 학교를 방문한 사진 작가가 원래 추천받았던 학생 대신 그녀를 표지 모델로 발탁하는 바람에 전국구 스타가 되었다. 그리고 여대생 시절 우연히 친구와 들렀던 의상실 ‘석경’에서 당시 패션 디자이너였던 故 배첨범 이화여대 명예교수를 운명적으로 만났다. 배 교수의 옷을 입고 여성지 화보를 촬영한 것이 패션 모델의 시작이었다. 길거리 캐스팅도 숱하게 당했지만 학교가 외부활동을 허락하지 않는 시절이라 졸업 후 본격적으로 모델 일을 시작했다.

그녀는 어릴 때부터 패션에 관심이 많았다. 초등학교 때 스타킹에 무늬를 디자인했고 신고 있던 고무신에 길거리 아스팔트 진액을 녹여 구두 굽을 만들어 힐처럼 신고 다녔다. 심지어 엄마가 버린 자투리 천으로 본인이 직접 치마를 만들어 입을 정도로 패션에 대한 남다른 끼가 있었다. 때문에 패션은 그녀에게 운명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당시로서는 큰 키인 169cm에 서구적인 외모로 인해 그녀는 모델로 데뷔하자마자 주목받았다. 처음 열린 수영복 패션쇼에서 신인이던 그녀는 당시 런웨이에서 ‘디스코 쇼’를 파격적으로 선보여 일약 스타 덤에 올랐다. 그녀는 모델 외에 가수로도 활동했었다. ‘예쁜 모델이 통기타도 잘 친다더라’ 소문에 MBC 예능프로그램 PD가 찾아와 노래를 들어보더니 당시 신인가수 등용 프로그램인 ‘데뷔 스테이지’에 출연시켰다. ‘눈이 나리네’‘고엽’ 같은 샹송은 그의 허스키한 목소리와 잘 어울렸고, 이후 4년간 음반을 2개나 발표했다.
또한 배천범 교수의 소개로 자신의 집을 영화 촬영팀에 잠시 빌려주게 되었는데, 촬영을 구경하고 있던 루비나를 보고 신상옥 감독이 다음 날 바로 영화 ‘여형사 마리’의 주연배우로 캐스팅해 영화배우로 데뷔했다. 물론 이후 섭외가 많이 들어왔지만, 밤새워 촬영하는 것이 힘들어 모두 거절했다고 한다.

그러나 팔방미인으로 전성기를 구가하던 그녀는 문득 정상에서 더 이상 갈 곳이 없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그 시점에서 그녀는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것과 평생 하고 싶은 일을 고민하다가 얻은 결론이 바로 옷 만드는 일이었다. 결국 모든 화려함을 뒤로 하고 그녀는 패션 디자이너의 삶을 선택했고, 1980년 중앙디자인그룹(JDG) 콘테스트에 입상하면서 패션 디자이너 길에 들어섰다.

1980년 3월 서울 제일백화점 지하에 조그만 의상실을 연 그녀는 동대문 시장에서 원단을 사서 옷을 만들었다. 첫 고객은 동료 모델들이었다. 남보다 늦게 시작했기에 두 배로 공부하고 노력했다. 결국 론칭 2년만에 주목을 받으면서 1982년 남산 하얏트 호텔에서 첫 개인쇼를 열었다. 쇼에서 선보인 옷이 모두 판매되었다. 1983년 ‘루비나 부티크’를 정식으로 론칭하며 본격적인 디자이너로 활동을 시작했다. 그녀는 “한국과 일본을 넘나드며 패션 쇼를 했고 제품을 만드는 족족 모두 팔려나갔다. 당시 나는 소재 개발에 집중을 집중했던 것 같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디자이너는 브랜드 루비나에 대한 정의를 내려달라는 질문에 한참을 고민하더니 “실루엣이 직사각형에 가까운 길고 슬림한 옷, 입었을 때 편안하고 세련돼 보이는 옷, 그 사람의 무드를 잘 표현해주는 옷이 루비나 다. 개인적으로 직사각형을 좋아한다. 안정적이고 익숙해 보이기 때문이다. 강렬한 포인트를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디테일이 많은 것도 특징이다.”라고 밝혀 자신이 ‘디테일의 여왕’으로 불리는 이유도 함께 설명했다. 참고로 루비나(본명 박상숙)라는 이름은 어릴 적 받은 가톨릭 세례명으로, 천사의 이름 중 하나라고 한다.

디자이너 루비나는 하늘과 허공에 넋을 놓고 있을 때 아이디어를 많이 얻는다. 사우나에서 머리를 비우고 있을 때 ‘유레카’를 외칠 때도 많다. 그녀는 “만물 창조주 하나님의 DNA가 내게 있다고 확신한다. 루비나 컬렉션에서 선보인 적이 있는 나뭇잎이나 꽃잎 패턴도 신호등에서 대기하며 하늘을 바라보고 있을 때 얻은 영감이다”라고 밝혔다.

또한 그녀의 시그너처인 에스닉한 룩에서 알 수 있듯이 이국적인 곳 으로의 여행을 좋아한다. 스스로 전생에 ‘집시여인’이었다고 말하는 그녀는 매 시즌 새로운 영감을 얻기 위해 여행을 자주 다녔다. 특히 아프리카 와 네팔 여행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살아가는 여인들의 매력적인 옷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낡고 헤진 것을 대충 걸쳐 입은 것 같지만 오묘한 색감의 조화를 관찰하는 것은 여행의 묘미이자 디자이너의 행복이었다.

지난해 2월에는 조카인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박자현과 함께 세컨드 브랜드 ‘루트원’을 런칭하며 60대 나이가 무색할 만큼 끊임없는 열정으로 도전에 나섰다. 그녀는 세컨드 브랜드 루트원에 대해 “2030세대를 겨냥했지만 4050세대의 루비나 고객들의 유입도 이어지고 있어 세대를 뛰어넘는 에이지리스 브랜드로 자리를 잡아가도 있다.”고 밝혔다. 루트원은 고급 소재와 과감한 컬러블로킹, 입체적인 패턴으로 오리지널 브랜드 루비나 못지않은 감도를 선보이고 있다. 여기에 가격도 합리적이다.

루비나 디자이너는 뒤늦게 출산한 루트원에 대한 자부심이 강했다. 그녀는 “루트원의 진가는 고객이 실제로 입어 봐야 안다. 팝업스토어에서 시착한 사람은 모두 다 샀을 정도로 반응이 좋았다. 보통 스타일리시한 옷은 특별할 때만 입을 수 있지만 루트원은 데일리룩으로 손색이 없다. 시크함과 스타일리시함의 균형을 타는 것이 어려운데 그 고민을 루트원이 해결해 준다”라고 강조했다.

런칭 만1년을 맞은 올해 초 ‘루트원’은 온라인 확대를 첫 목표로 잡고 종전보다 분명해진 컨셉과 컨템포러리 무드를 극대화 시킨 제품을 선보였다. 현재 디자이너 편집숍 W컨셉, 자사몰, 신세계몰 등 여러 온라인 쇼핑몰에 입점해 있으며 자사몰 활성화를 위해 아울렛 카테고리를 신설하고 재고를 판매하고 있다. 마케팅에도 온라인을 적극 활용해 페이스북, 인스타그램과 같은 SNS와 블로그를 운영 중이다.

호기심·열정·도전 정신이 빚어낸 37년의 ‘끝없는 여행’
현대 패션은 라이프 스타일과 시대를 반영하는 거울이다. K-패션에도 60년대부터 본격화된 하이-앤드 패션에 대한 흔적들이 레전드 디자이너들의 아카이브에 그대로 녹아있다. 구호뿐인 K-패션이 아닌 경쟁력을 갖춘 K-패션이 되기 위해서는 한국의 패션 역사에서 그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디자이너 루비나의 지난해 아카이브 전시는 의미 있는 행보의 시작이었다.

서울패션위크에서 ‘끝없는 여행(Endless Journey)’을 타이틀로 기획 된 아카이브 전시회에서는 옷과 여행을 사랑하는 디자이너의 호기심·열정·도전 정신이 빚어낸 37년간의 작품을 선보였다. 그녀의 보헤미안적인 시그너처의 원천과 소재 탐구에 대한 남다른 열정을 확인해 볼 수 있는 아카이브는 요즘 유행하는 다양한 트렌드의 전형을 보여주었다.

당시 전시를 기획한 서영희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는 “선생님의 옷을 보면 달다,엮다,뜨다,묶다,꼬다,꿰매다,물들이다.덧붙이다 등 온갖 섬세한 손동작을 다 떠올리게 된다”며 150벌이 넘는 의상과 설치미술의 조화를 꾀한 이유를 설명했다. 이어 그녀는 “한 순간도 쉬지 않고 기술과 소재를 접목시켜 새로운 것을 만들어온 창의성과 노력의 결과를 관객에게 보여 주고 싶었다. 지구 곳곳을 여행하며 체득한 이국적 미감을 시그니처인 에스닉 룩으로 표현해온 보헤미안 기질 역시 잘 느껴보시길 바란다”고 덧 붙였다.

전시회 작품들은 루비나 디자이너의 영감을 자극하는 주재료인 나무가 주인공이었다. 당시 필자와의 인터뷰에서 디자이너 루비나는 “사실‘나무 색깔’이라는 건 세상에 없다. 나무뿌리부터 줄기까지 껍질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저마다 기묘한 빛깔을 띠고 있는데 어느 것 하나 똑같은게 없다. 나무의 그 은밀한 차별성과 왕성한 생명력이 참 좋다”며 전시회에 녹아든 나무에 대한 자신의 철학을 설명했다.

K-패션 성공은 정부 지원 뒷받침 돼야
선배 디자이너로서 한국 패션의 과제로 떠오른 K-패션, 즉 한류 패션에 대한 생각을 질문했다. 이에 디자이너 루비나는 “K-패션이 진정한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서는 정부의 지원이 뒷받침돼야 한다”고 밝혔다. 이어 그녀는 “최근들어 많은 젊은 브랜드가 탄생하지만 비용이 뒷받침되야 하는는 마케팅력이 부족해 좌절하는 모습을 많이 본다. 일본의 꼼데가르송,요지 야마모토, 이세이 미야케와 같은 브랜드가 세계적인 브랜드가 된 비결은 그들의 능력도 한 몫했지만 정부가 컬렉션을 지원해 해외 진출을 도와준 것이 핵심이다. 우리의 젊은 브랜드들은 해외에 나가려고 해도 스폰서가 없기 때문에 개인이 비용을 대야 한다, 때문에 실력이 있어도 자금이 없어 좌절하는 경우가 많다. K-뷰티, K-푸드와 함께 K-패션을 세계에 이식하기 위해서는 정부가 전시 행정을 펼칠 것이 아니라 잔기적인 시각을 가지고 지속 가능한 지원 사업으로 육성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특히 K-패션이 한 단계 도약하기 위해서는 정부와 민간이 합작해 우리만의 ‘메이드 인 코리아 섬유’를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자체 소재를 개발하면 원가 경쟁력을 갖출 뿐 아니라 수출까지 할 수 있기 때문에 일거양득이라는 것이다. 이어 디자이너 루비나는 “과거 대구의 ‘밀라노 프로젝트’는 섬유 산업을 고부가가치 산업으로 육성하기 위해 추진됐지만 정치 논리에 휩쓸려 헛돈만 날리고 실효성 없이 실패함으로써 ‘코리아 소재’의 꿈이 물거품이 된 바 있다. 이태리 섬유를 사올 경우 대량으로 구매해야만 판매하기 때문에 접근성이 크게 떨어지고, 수입을 하다 보면 이중 관세로 옷의 가격이 급등해 가격 경쟁력을 갖기 어려운 게 현실”이라고 강조했다.

마지막으로 그녀는 “루비나 부티크가 한국시장에서 명품으로 우뚝서 오랫동안 사랑받는 브랜드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소망을 밝혔다. 이어 “물론 그렇게 되기 위해서 내가 가진 모든 열정과 역량들을 쏟아 부어야겠지만 말이다. 루비나 부티크가 명품으로 인정받는 것과 함께,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어려움을 겪는 이웃들과 함께 희망을 나눌 수 있었으면하는 것이 나의 꿈이다.”라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