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을 떠나 먼 나라 이탈리아의 고도 페루지아에서 언어대학을 다니며 지낸 유학 첫 1년간의 나날들은 모든 것이 낯선 세상에서 처음 마주하게 되었던 흥미로운 경험들의 연속이었다. 예상할 수 없었던 우리와의 우연한 만남으로 삶이 바뀐 왕 린창은 메이링과의 결혼 준비를 위해 당분간 대만으로 돌아간다고 했다. 피렌체로 이사하기로 정한 기간이 2개월여 앞으로 다가왔을 즈음 우리와 비슷한 시기에 유학을 온 다른 유학생들도 각자 자신의 전공분야에 따른 학교가 있는 로마나 밀라노 토리노 혹은 베네치아 등 다른 도시로 떠날 계획을 하고 있었다. 

이시기 유학생활 중 잊을 수 없는 1986년 6월의 이탈리아는 온 나라가 멕시코 월드컵 축구에 대한 열기로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대한민국도 32년 만에 본선에 진출하게 된 터여서 우리 유학생들의 관심과 열기도 고조되고 있었다. 당시 페루지아에 거주하던 한국 유학생들은 축구 동호회를 만들어 유니폼까지 갖춰 입고 이따금 주말이면 동네 축구장을 빌려 시합을 하곤 하였으니 한국의 축구 사랑도 결코 이탈리아에 뒤지지 않은 것이었다. 그러나 지난번 월드컵의 우승국이자 다음 월드컵의 개최국인 이탈리아의 축구에 대한 열정은 가히 광기에 가까운 것이었다. 경기가 있는 날엔 거리가 텅 비고 고속도로마저 한산할 정도였다. 경기가 끝나면 온통 깃발을 들고 밖으로 뛰쳐나와 폭죽에 나팔을 불고 차량의 경적을 울려대며 밤이 새도록 승리의 기쁨을 누렸다. 우리나라는 강력한 우승 예상 팀이 둘이나 포함된 소위 죽음의 조인 A조에 속해 아르헨티나, 이탈리아, 불가리아와 차례로 경기를 치러야 했다. 당시 김 정남 감독이 이끄는 대한민국 팀은 세계최고의 공격수 마라도나가 뛰는 아르헨티나와의 첫 경기에서 3:1로 패했고 불가리아와의 경기는 1:1로 비기며 예선 마지막 경기인 이탈리아와의 경기만 남겨놓고 있었다. 이탈리아와의 경기가 있던 6월 10일 페루지아 한국 유학생들은 함께 모여 응원하기 위해 우리 집으로 모였다. 좀 더 공간적인 여유가 있고 대형 TV가 있었던 우리 집 별채의 부엌은 열댓 명이 함께 경기를 보기에 적당했다. 대한민국 팀이 세계 최강 수준의 이탈리아를 상대하기에는 역부족 이었지만 최 순호 와 차 범근 선수가 맹활약한 우리나라는 이탈리아 골 망을 2번이나 흔들어 이탈리아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