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와 함께 살게 된 ‘불법 체류자’ 왕 린창은 바깥 외출을 극도로 자제했다. 혹시 있을지도 모르는 이탈리아 경찰의 불심검문이 두려웠던 것이다. 이따금 함께 장을 보러 수퍼마켓에 갈 경우에도 홀로 차에 남아 있었을 정도였다. 하지만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자 불안감은 점차 해소되고 함께 장을 보러 외출도 하기 시작했다. 한 가지 새로운 사실은 그가 매우 훌륭한 요리솜씨를 갖고 있는 요리사라는 것이었다. 대를 이어 음식점을 가업으로 운영했던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솜씨를 그대로 물려받은 듯 했다. 덕분에 우리 식탁에는 린창이 손수 만들어주는 맛있는 중국요리가 인기 메뉴로 자주 등장하기 시작했다. 특별한 날에는 손수 재료를 준비하고 공산중국에서 온 솜씨 좋은 유학생 친구와 함께 여러 가지 멋들어진 요리를 차려 언어대학의 외국인 친구들을 초대하여 파티를 열기도 하였다. 남북이 극단적 이념 대립의 관계에 있어 경계심을 놓지 않고 사는 한국 유학생들과는 다르게 대만과 중국 학생들은 정치적 이념과 상관없다는 듯이 서로 교류하며 친분을 쌓았고 그 모습은 참으로 우리와 달라 부러웠다. 우리가 한국에서 여권을 받기 전에 유럽지역 유학생을 대상으로 받은 보안 교육내용 중에서 김 일성 뱃지를 달았거나 북한에서 온 것으로 보이는 사람을 보면 무조건 자리를 피해 떠나라고 한 것은 그들 사이에는 전혀 상관없는 우리들에게만 해당되는 특별주의사항 이었던 셈이다. 당시 로마에는 북한 문화원이 있어 실제로 상당수의 북한사람들이 상주하고 있었다고 한다.

한편 언어대학에서 나는 이제 중급 코스의 마지막인 최상급 반으로 올라갔고 내가 도착한 이후 6개월이 된 1986년 봄 페루지아의 한국인 유학생 수는 빠르게 증가하여 50여명이 넘게 되었다. 한국인에겐 오지와 같았던 이탈리아가 이제 예술과 디자인의 선진국으로 인식되어 부각되고 있다는 반증이었다. 한국 유학생 상호간의 교류도 더욱 넓어져서 학교에 관한 새롭고 유익한 정보들이 공유되었는데 그중에는 우리에게 생소한 패션학교인 폴리모다 (Polimoda)란 학교가 피렌체(Firenze)에 새로 설립되어 첫 신입생을 모집한다는 귀가 솔깃한 정보였다. 지금 같으면 인터넷으로 모든 정보를 받아 알아봤겠지만 당시엔 직접 학교를 찾아가는 방법만이 가장 정확했다. 피렌체는 페루지아 에서 차로 불과 2시간 거리에 있어 수월하게 당일치기 여행이 가능한 도시였다. 곧 나는 일단 날을 잡고 폴리모다 학교를 알아보기 위해 피렌체로 향했다. 처음 대하게 되는 르네상스의 발원지 피렌체는 고속도로를 달리며 그곳에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참으로 독특하고 아름다운 풍광으로 우리를 맞이하고 있었다. 밀라노와는 사뭇 다른 시간의 색깔이 도시 곳곳에 스며들어 아름다운 빛을 발하고 있었다. 피렌체 시 외곽 언덕의 아름다운 고택 빌라 스트로치(Villa Strozzi)건물에 자리 잡은 폴리모다는 뉴욕 FIT의 자매 학교로서 FIT 교수인 앨런 피시맨 (Allen Fishman)이 초대 학장이었다. 나와 내 아내는 첫눈에 피렌체의 아름다움에 반해버렸고 피렌체에서 살아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포트폴리오 마감기일이 너무 촉박했지만 일단 피렌체 폴리모다 쪽에도 원서를 제출해 보고 밀라노의 마랑고니 입학을 함께 준비하는 것으로 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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