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적으로 경쟁력을 갖춘 디자이너가 되기 위한 새로운 도전

나는 전날의 치열했던 패션대전 행사와 대상을 받았다는 사실이 아직 꿈결 같은 가운데 평소보다는 좀 늦은 시간에 회사로 출근했다. 마침 반근일인 토요일인데다가 푹 자고 천천히 출근해도 좋다는 황 실장의 배려 덕분이었다. 사무실 안은 평상시와는 달리 한사람도 자리에 보이지 않고 텅 비어 있었다. 의아한 눈으로 여기저기를 둘러보던 중 사무실로 연결된 미용 실습실 문을 여니 캄캄한 홀 안에서 환하게 불이 켜지며 케이크를 준비하고 기다리던 모든 직원들이 환호를 지르며 나를 맞는 것이었다. 수상을 축하해 주기위한 깜짝 퍼포먼스였다. 황 혜숙 실장을 비롯한 모든 직원들의 따뜻한 마음에 목이 메어 울컥 눈물이 솟았다. 나의 대상획득에는 운도 따랐겠지만 무엇보다 내게 여러 프로젝트를 통해 창의적 능력을 갖게 해준 회사가 내 에너지의 근원이었다. 내 작품의 이면에는 용기디자이너 시절 얻은 초자, 플라스틱, 알루미늄 등 다양한 재료의 사용 경험과 메이크업 아티스트 활동, 코오디네이터 업무, 배 천범 교수님과의 대형 쇼 기획과 연출 그리고 퍼퓸의 아름다운 향기에 대한 육감적 기운까지도 모두 존재하는 지난시간의 에너지가 응축되어 있었을 것이다.

이제 내 인생의 미래를 가를 가장 중요한 일은 유학 이었다. 지금과 다르게 당시 수상자의 유학은 선택사항이 아닌 필수 조건이었다. 1980년대 한국의 섬유산업이 봉제 산업을 뛰어넘는 고 부가 가치화를 실현하려면  국제적으로도 경쟁력을 갖춘 디자이너가 필요했다. 이에 따라 재능 있는 인재를 선발하여 선진패션 유학을 통해 양성해야 한다는 시대적 요구가 부각되었고 이에 부응하기 위해 마련된 행사가 패션대전 이었던 것이다. 수상자들에겐 글로벌 패션의 중심지인 뉴욕, 파리, 밀라노, 런던 등의 패션학교 진학의 선택권이 있었고 해당학교 입학 허가를 취득하고 유학 비자를 받은 후 최종적으로는 발권된 왕복 항공권도 함께 제출해야 비로소 상금을 지급 하는 것으로 규정하고 있었다. 회사에선 전사적으로 나의 대상수상 소문이 퍼져 연관이 없던 부서의 선후배 직원들까지 모두가 나를 알아보고 축하를 보내 주었다. 회사는 너무 고맙고 모두에게 인정받는 것도 좋아 이대로 정말 행복했다. 하지만 몇 년이 걸릴지 모를 먼 유학길에 오르기 위해서는 8년을 한결같이 근무했던 정든 회사를 떠나야 했다. 일단 6개월 후인 1985년 1월을 적정한 사직 시기로 정하고 유학 준비와 동시에 그간 미뤄왔던 대학원의 석사학위 논문을 시작했다. 논문 지도교수께서는 내 현재 업무와 밀접한 연구주제를 제안 하셨는데 일반적인 의상관련 연구와 차별되는 연구가 좋겠다고 하시면서 제목은 ‘토탈패션 으로서의 메이크업에 관한 연구’로 정하였다. 논문과 연계한 작품도 함께 제시하게 되어있어 나는 아직 대외적으로 미공개 상태로 준비 중이었던 다음 시즌의 아모레 봄 메이크업 트렌드를 테마로 하여 작품을 진행하기로 하였다. 아모레 퍼시픽 코오디네이터로서의 마지막이 될 일이었지만 회사의 업무와 논문 연구의 주제가 일맥상통하여 상호간에 효과적이었다. 한 학기동안의 논문연구 과정에서 집중적으로 섭렵하게 된 여러 권의 관련 서적들은 나에게 패션과 메이크업에 관한 좀 더 새롭고 깊이 있는 안목을 가질 수 있게 했다.

작품은 화사한 봄의 향기를 코오디네이션 하는 것으로 정하고 핑크와 바이올렛 펄 실버로 연출 하고 아모레 전속이었던 황 신혜를 모델로 촬영하여 제시 하였다. 석사 작품 심사과정에서 내가 작품으로 제시한 메이크업은 기존의 의상 작품들과는 너무도 다른 장르였다. 이런 이유로 심사는 예상외로 길어졌고 화장과 패션의 연관성에 대해 질문이 길어졌다. 심사는 무사히 통과 되었고 이 연구는 한국에서는 최초로 패션과 메이크업에 관한 내용을 다룬 석사논문이 되었다.

그 사이 5명의 패션대전 수상자들 중 두 사람은 이미 뉴욕과 파리로 유학을 떠났다. 존경하는 디자이너 진 태옥 선생님은 파리를 유학지로 추천해 주셨고 나의 멘토 배 천범 교수님은 어느 곳으로 유학을 가던 헤어와 메이크업도 더 배워오라고 하시면서 우리 감각은 이미 상당한 수준에 도달해 있으니 이보다 그들의 기술과 실무적 노하우에 더 관심을 두어 공부하라는 구체적인 조언도 주셨다. 나에게 세계패션의 중심지인 뉴욕이나 파리는 모두 놓치기 싫은 매력적인 도시였지만 내 마음은 이탈리아 쪽으로 기울었다. 그 시절 우리에게 밀라노는 파리나 뉴욕에 비해 생소한 도시였으나 오히려 내겐 그 점이 미지의 세상에 대한 호기심과 매력으로 다가왔다. 패션명품 불가리(Bvlgari), 구찌(Gucci)와 발렌티노(Valentino)가 있는 나라, 대학시절 수입된 디자인서적을 통해서도 알고 동경하던 루이지 꼴라니(Luigi Colani) 와 피닌파리나(Pininfarina), 쥬지아로(Giorgetto Giugiaro) 가 있는 나라이기도 했다.

나는 퇴직예정일에 맞춰 사직서를 회사에 제출해 놓고 까다로운 유학 비자를 받기위해 이미 도착한 밀라노의 마랑고니 입학허가서를 첨부해 받아야 할 복잡한 서류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한편으론 회사 업무에 차질이 없도록 인수인계를 진행해 가고 있던 어느 날 인사부장 으로부터 호출 연락이 왔다. 인사부장 방으로 찾아가니 차를 권하며 가볍지 않은 한 가지 제안을 하는데 그것은 유학 행선지를 파리로 바꾸는 것이었다. 파리에 아모레 지사가 있으니 그곳 소속으로 발령받아 가서 원하는 학교도 다니고 회사일도 병행해 보면 어떻겠냐는 제안이었다. 너무도 파격적이고 감사한 제안이었다. 며칠을 고민하고 또 고민했지만 이미 6개월이나 진행되어온 이탈리아 유학 준비과정을 접고 모두 원점으로 되돌리기엔 늦었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사정을 인사부장에게 정중히 전달한 후 이듬해인 1985년 1월 11일 부로 정든 회사를 떠나게 되었다. 나는 지금도 만약 반년쯤 출발이 늦어졌더라도 그때 그 제안을 받아들여 파리 행 유학을 택했었다면 내가 어떤 존재가 되어 있을까를 상상해 보곤 한다. 참으로 ‘너의 생각이 곧 너의 운명이 된다 (what you think is your destiny)’ 라고 한 마가렛 대처의 말이 와 닫는 경우이다. 내가 친형처럼 좋아하고 가깝게 지내던 KJ 형은 한창 유학을 준비 중이던 나에게 ‘내 생각에 이 세상 어떤 일이든 적어도 10년은 초지일관으로 해야 비로소 입문을 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이라고 하였다. 이미 미국 유학경력에서도 선배였던 KJ 형의 한마디 짧은 충고는 일순간 내 생각과 강하게 동조되며 가슴깊이 각인되고 있었다.

이제 비자도 받고  8월 30일자 로마행 알리탈리아 항공권도 발권 받아 유학 지원금 1300만원도 입금 되었으니 떠나는 일만 남았다. 우리의 첫 행선지는 국립 이탈리아 언어학교가 있는 이탈리아 중부도시 뻬루지아(Perugia)로 로마에서 기차로 3시간여 거리에 있었다. 살던 집과 모든 짐들을 정리한 나와 내 아내는 커다란 이민가방 2개에 필요한 물건을 챙겨 김포공항  출국장에서 수속을 마친 후 우리를 환송해 주러 나온 가족들과 친구들에게 작별을 고하고 로마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드디어 미지의 나라로 향하는 20여 시간의 긴 여정을 위해 비행기가 이륙하고 창밖으로 멀어져가는 서울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나의 마음은 설렘과 불안함 그리고 비장함이 교차하고 있었다.

실체를 가늠할 수 없는 미지의 패션세상을 향해 날아가는 비행기 안에서 나는 되 뇌이고 또 되뇌었다. 반드시 이 다른 패션세상 안으로 들어가 유럽 패션의 중심 무대에서 놀아보자. 5년이 걸려도 10년이 걸려도 초지일관 이 꿈이 현실로 이뤄질 때 까지 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