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대문 시장에서 옷 장사를 한 후 1988년에 만든 뉴 웨이브 브랜드 ‘데무’가 강산이 세 번 바뀌는 동안 어느새 전 세계 40여 개 매장에서 판매되는 대한민국 대표 브랜드로 성장했다. 모노크롬 소프트 아방가르드와 해체주의가 만난 ‘데무’는 DDP에서 세월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브랜드만의 아카이브를 정리한 회고전을 열었다.

20대에 시작한 옷 장사부터 계산하면 40년 세월이고, 30대의 브랜드 ‘데무’ 런칭으로 계산하면 30년 세월이다. 때문에 디자이너 박춘무에게 패션은 바로 ‘삶’ 그 자체다. 40 평생을 패션만 해기 때문에 60년 인생의 2/3를 차지한다. 어떨 때는 패션이 너무 싫었고, 어떨 때는 너무 좋았다.

그렇게 패션이라는 한 우물만 파다 보니 강산이 3~4번 바뀌는 세월동안 한국 패션의 허리 역할을 하며 K-패션의 헤리티지로 남았다. 그동안 대한민국 패션에서는 많은 디자이너와 브랜드들이 탄생하고 소멸했다. 그 폭풍 속에서 꿋꿋하게 살아남은 뉴-웨이브 디자이너는 이제 레전드-웨이브 디자이너로 새로운 대한민국 패션사를 쓰고 있다.

‘무(無)로부터’ 시작된 30년의 아카이브 ‘코리안 아방가르드‘
최근 디자이너 박춘무는 서울 동대문디자인플라자에서 특별한 아카이브 회고 전시회를 열어 주목을 받았다. 바로 패션 디자이너의 데뷔 30주년을 기념하는 전시였다. 전시 명은 브랜드 이름 그대로 ‘무(無)로부터’다.

데무 브랜드 30주년에 대한 감회에 대해 그녀는 “정말 힘들게 일궈낸 성과다. 데무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비결은 고집 때문이다. 다른 브랜드처럼 손님들의 비유를 맞춰가며 디자인했다면 아마 브랜드는 사라졌을 것이다. 고집만으로 디자인하다 보니 힘들 때도 많았지만 마니아층도 생겨 이렇게 30주년을 맞을 수 있었다.”고 밝혔다.

이번 전시회에는 과거에 선보였던 옷을 연대순으로 배치했다. 세탁비만 1,000만원이 들었다고 한다. 놀라운 것은 각기 다른 시기에 제작된옷들이 마치 한 시기에 만든 것처럼 자연스럽게 어우러졌다. 매 시즌 숨가쁘게 변화하는 유행 속에서도 디자이너 박춘무가 30년 동안 일관된 감성과 스타일을 유지했다는 증거였다. 어쩌면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반복하다보니 생긴 디자인 나이테일 수도 있겠다.

전시회에 대해 디자이너 박춘무는 “30년 동안의 스타일 중 가장 변화된 부분은 어깨다. 1980년대는 어깨를 과장하기 위해 패드를 넣기도 했지만 지금은 슬림하게 떨어지는 핏을 좋아한다. 기능성 소재가 좋아지면서 타이트한 옷들도 많아지고 인조모피도 주목을 받는 등 패션은 시대 별로 진화했다. 이러한 점을 염두에 두고 전시를 기획했다.”고 밝혔다.

특히 아티스트 10인과 함께한 컬래버레이션 코트 컬렉션이 눈에 띄었다. 컬렉션에는 배우 한고은, 가수 김윤아, 배우 변정수, 배우 한예리, 가수 이은미, 드로잉 아티스트 켈리박, 배우 정혜인, 모델 송경아, 배우 배종옥, W잡지 편집장 이혜주 등이 참여했다. 그녀는 “오랜 시간 데무가 자리 잡고 사랑받을 수 있도록 도움을 주신 분들이다. 그들에게 어울리는 코트를 만들어주고 싶어 한정판으로 기획했는데 소비자들로부터 반응이 폭발적이다”라고 설명했다.

한편 이번 회고전에서 디자이너가 취미삼아 그려온 크로키와 회화작품도 소개되었다. 작품을 전시하기로 결정한 후 그 어떤 패션쇼 때보다 긴장감에 시달렸다. 매일 그림을 그렸기 때문이다. 어떤 날은 일과를 마치고 새벽 5시까지 작업했다. 다행히 반응이 좋았다. 전시회에서 그림을 팔라는 제안을 받을 정도로 그녀의 그림 실력은 수준급이다. 이번 전시회에는 구조적이고 정밀한 느낌의 구성주의적인 작품을 다수 선보였는데 전시된 옷들과 많이 닮았다. 어쩌면 그 그림들 속에는 그녀가 옷을 지으면서 살아온 30년 인생이 추상적으로 고스란히 담겨있는 듯했다.

‘패션 디자이너’와 ‘화가’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다
패션 디자이너 성공한 후 원래 꿈인 화가라는 또 다른 경력을 추가한 그녀의 인생은 지금 ‘화양연화’가 아닐까 한다. 그래서 큰돈을 번 것은 아니지만 하고 싶은 옷을 아직도 만들고 있고 그림을 그릴 물감 살 돈도 충분하기 때문에 당장 그만둬도 후회 없는 삶이다. 보통 생계를 위해 사회 생활을 하다보면 자신이 잘하는 일과 하고 싶은 일이 불일치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녀는 패션 인생 40년 만에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은 행복한 사람이다.

그녀는 화가가 된 이유에 대해 “그림은 내게 돌파구 같은 존재였다.주변에 물감이 많아 우연히 시작했는데, 지금은 취미로 계속 그리고 있다. 팔 마음이 없어서 그냥 마음이 가는 데로 편하게 그린다. 옷은 팔아야 한다는 스트레스가 있지만 그림은 그렇지 않아서 부담이 없다.”고 밝혔다.

디자이너 박춘무는 관습에 얽매이거나 꾸미는 것을 아주 싫어한다. 그녀의 패션 철학은 명료하면서도 심플하다. 옷은 화려해서 튀기보다는 입는 사람을 돋보이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화려한 컬러나 프린트를 사용 하지 않고 무채색을 고집하는 것 역시 패션철학의 연정선이다. 하지만 데무 옷은 개성이 강하다. 그래서 매출은 유행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그런데도 30년 동안 버틴 원동력은 바로 중심을 잡아가는 현명한 균형감각 때문이다.

그녀는 “팔아서 남기길 원하고 유행만 쫓는 디자인에 중점을 두기보다는 내 나름대로 고집을 갖고 나만의 디자인을 추구했다. 가장 고집을 부렸던 것이 바로 시즌마다 선보이는 패션쇼였다. 정기적인 패션쇼가 없었으면 새로운 것에 대한 도전이 없었을 것이고, 그러면 버티기 힘들었을 것이다. 패션쇼를 위해 끊임없이 개발한 것이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30년을 이끌어 올 수 있었던 원동력이 아닐까 한다.”고 말했다.

40년을 함께 한 패션은 그녀에게 ‘삶’ 그 자체
디자이너 박춘무는 아동복 사업을 하는 집안에서 자랐다. 어릴 적부터 화가가 되는 것이 꿈이었지만 가세가 기우는 바람에 고등학교를 졸업하자 마자 남대문 시장에서 옷장사에 뛰어들었다. 시장에서 옷을 떼다 명동 소매점에 팔았는데 장사가 아주 잘됐다. 나중에는 가게를 세 개나 늘릴 정도로 그녀는 장사 수완이 뛰어났다. 젊은 나이에 생각지도 못한 큰돈을 벌었지만 정작 본인은 행복하지 않았다. 화가에 대한 꿈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었고 소매 장사는 왠지 자신과 잘 맞지 않은 옷을 입은 듯 답답하고 거추장스러웠다.

결국 그녀는 일생일대 큰 결심을 하게 된다. 늦었지만 자신이 꿈꾸었던 열정에 도전하고 싶었다. 바로 패션 디자이너였다. 지난 1987년에 사업을 접고 국제복장학원에 들어갔다. 이듬해 동료 디자이너 2명과 협찬을 받아 데뷔 패션쇼를 열었다. 꽃무늬가 들어간 화려한 여성복 사이에서 색도 장식도 없는 그녀의 옷은 파격 그 자체였다. 심지 당시 패션 잡지 <멋>은 “무색무취(無色無臭)의 옷이다. 이건 옷도 아니다”라는 악평을 실었다고 한다. 하지만 디자이너 박춘무는 일희일비하지 않고 자심만의 고집스런 ‘마이 웨이’를 고수했다. 이미 꿈을 위해 옷 장사를 그만두면서 상업적인 타협과는 거리를 두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데뷔 초기의 여유로움과 비전이 30년 세월을 버티게 만든 원동력이자 버팀목이었다. 지속성과 일관성없는 K-패션의 한계가 력셔리 브랜드 탄생의 걸림돌이라면 디자이너는 그 단계를 뛰어 넘은 셈이다.

1988년 디자이너 박춘무는 신인 디자이너로는 다소 늦은 나이인 34세에 압구정동에 ‘데무(DEMOO)’라는 옷 가게를 열었다. 당시 패션 업계는 내셔널 브랜드, 부티크, 양장점 등이 주류다. 브랜드 이름도 박춘무 패션, 박춘무 부티크 등이 어울리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런 고정관념이 싫었다. 결국 설치 미술과 최정화와 함께 자신의 이름 끝 자에 ‘~부터’라는 뜻을 지닌 프랑스어 ‘드(de)’를 붙여, ‘모든 것은 나로부터 시작된다’는 의미의 ‘데무’라는 브랜드 이름을 지었다.

처음 선보인 데무 옷은 신인 디자이너치고는 아주 잘 팔렸다. 당시 패션계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파격적인 디자인과 스타일로 화제를 모았다. 특히 88 서울 올림픽 이후 패션을 보는 수준이 남달라진 대한민국 여성들의 니즈를 층족시키기에 충분했기 때문이다. 흔히 마담 존으로 불리는 부티크는 물론 기성 여성복과도 차별화된, 앤드로지너스적인 중성적 모노크롬의 한국적 아방가르드 컨셉은 새로움을 넘어 신선함 그 자체였다. 남성복 같은 여성복, 지퍼로 구조를 자유자재로 바꾸는 옷, 밑위가 긴배기바지 등 실험적인 옷들이 불티나게 팔렸다.

기본적인 미니멀 스타일에 새로운 시도가 적절하게 더해진 데무만의 스타일을 꾸준히 찾는 데무 마니아층도 오랜 세월만큼 두터워졌다. 그녀는 “나는 개인적으로 남들이 좋아하는건 싫어하고, 싫어하는건 좋아하는 마이너적인 취향이 있다. 뭐 하나에 꽂히면 집요하게 파고드는 성격이라 살아남았지 않았나 싶다”고 강조했다.

한국을 뛰어넘어 세계로 향하는 K-패션 사령관
결국 한국에서의 성공을 뛰어 넘어 1999년 파리패션위크에서 패션쇼를 선보였으며 글로벌 진출의 단초를 마련했다. 이어 2010년부터는 뉴욕패션위크에서 패션쇼를 선보였다. 한복의 동정과 깃을 응용하거나 수묵화를 입체적으로 표현한 옷을 선보여 호평을 얻기도 했다.

그의 옷은 국내 매장 외에도 패션의 본고장 이탈리아를 비롯해 홍콩,상하이, 뉴욕 등 전 세계 40여 개 매장에 진출한 디자이너 박춘무 대표는 여전히 목마르다. 그는 국내 시장의 한계를 벗어나기 위해 해외에서 활로를 모색하고 있다. 박 대표는 “한국은 큰 땅이 아니다. 밖으로 나가지 않으면 머무르게 된다”며 “데무는 수십개국에 수출하고 있지만 여전히 글로벌 브랜드로 클 수 있을까 고민하고 있다”고 말했다.

디자인 영감의 원천에 대한 질문에 그녀는 “출장을 다니다 보면 주로 미술관, 전시 등을 보러 간다. 작품에서 많은 영감을 받는다. 그리고 평소에도 좋은 음식을 먹고 좋은 것들을 보는 등 생활 전체적인 것이 나의 영감이 된다.”고 밝혔다.

마지막으로 선배 디자이너의 후배 디자이너에 대한 조언을 질문했다. 그녀는 딸을 포함한 후배 디자이너들에게 “고집과 끈기를 가지고 좋아하는 옷을 계속했으면 좋겠다. 본인이 좋아하는 것을 해야 잘 할 수 있다. 물론 처음은 힘들 수 있다. 좋아하는 것을 포기하지 말고 깊이 있게 했으면 좋겠다. 굉장히 열심히 하지 않으면 살아남기 힘들다.”라고 말했다.

옷 파는 사람으로 10년, 옷 짓는 사람으로 30년을 살아온 60대 디자이너 박춘무는 나이가 무색할 만큼 행동과 말투에 젊은 열정이 느껴졌다.전시회에 걸려 있는 옷에 대한 비하인드 스토리를 털어 놓는 그녀의 설명을 기억력 그 이상의, 한 작품 한 작품 만들 때마다 혼을 불어넣는 장인 정신의 단초를 발견할 수 있었다. 아직도 그녀에게 은퇴란 먼 미래처럼보인다. 어쩌면 숙성된 데무의 앞으로의 10년, 20년이 더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