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984년 6월 15일 서울 힐튼호텔 컨퍼런스룸에서 개최된 제2회 대한민국 패션대전 행사의 규모는 지난 1회 때에 비해 전폭적으로 확대 되었고 수상자 5명의 상금 액수도 대폭 상향 조정 되었다. 특히 해외 유학 지원금인 대상 상금액은 1,300만 원으로 당시 강남구 개포동의 소형 주공아파트 한 채 가격에 맞먹는 실로 엄청난 액수였다. 국내 패션계를 망라한 세간의 관심이 집중된 가운데 치열한 열기로 가득한 결선대회의 날이 드디어 열리고 있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이지만 심사의 방법은매우 엄격해 대회 하루 전날 이미 제출된 본선실물 작품을 모두 행거에 걸어놓고 봉제와 원부자재 사용에 관한 점수를 매긴다. 다음날 아침힐튼호텔 피팅룸으로 옮겨진 작품들을 오후 리허설 쇼의 과정에서 10점의 입상 후보를 선별한 후 저녁 6시부터 열리는 최종 본 패션쇼를 통해 입상후보자 10명을 발표하고 그중 5명에게 은상 2 금상 2 대상 1을 선정 발표하는 긴 심사과정이었다.

당시의 심사위원단은 공석붕, 앙드레 김, 진태옥, 신혜순, 조규화, 이호정, 유송옥, 까르벤정, 임상민, 김 희, 김 청 등 한국 패션을 대표하는 산업계, 학계, 디자이너들로 선정돼 총 14명으로 구성됐다. 모든 출품자들이 스테이지 뒷편 피팅룸에서 총 연출 배천범 교수님의 지휘아래 각자 분주히 리허설을 준비하는 사이 심사위원단은 메인 스테이지 앞에 마련된 테이블에 배석하고 있었다. 피팅룸에서 보이는 출품작들은 단순한 형태의 내 작품과는 매우 다르게 화려하거나 혹은 다소 과장되거나 또는 한국적 모티브를 적극 응용한 의상들이 주류를 보였는데 그것은 지난해의 수상작품에서 영향받은 결과로 보였다. 내가 제작한 2벌의 작품은 모던한룩을 지닌 단순한 형태의 블랙 원피스로 한 벌에서 보여지는 조형성은 매우 비대칭적인 형태지만 2벌이 나란히 함께 서면 완벽한 대칭적 구도가 연출되도록 의도한 의상이었다.

소재는 검은색 가죽과 검은색 모직물만을 매치해 재질감의 차이에서 오는 미묘한 시각적효과를 노렸다. 3겹의 검은색 아크릴판을 타원형으로 커팅하고 열처리해 제작한 모자는 액세서리로서 뿐만아니라 의상의 곡선적 흐름이 시각적으로 더욱 강조되도록 의도하였다. 블랙 의상에 좀 더 강한 대비를 주기 위해 모델 메이크업도 창백해 보이는 실버톤을 첨가하도록 했다.

총 36 작품 중 23번을 배정받은 나도 순서에 따라 리허설 쇼를 마친 후 여러 사람들과 섞여 곧 있을 본 쇼를 준비하느라 번잡한 피팅룸안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이때 본선 쇼의 최종점검을 위해 피팅룸에 들르신 배 교수께서 나를 찾아 부르시더니 “강병석씨 작품을 드로잉 상태에서 볼 때는 약해 보였는데 실물 작품이 생각보다 훨씬 더 멋지다”라고 한마디 하시고 지나가셨다. 모두가 리허설 쇼의 심사 결과에 대해 궁금한 상황이었던 중에 던지신 이 한마디 말씀이 내겐 큰 위로가 되었지만 후일 일부의 억측과 오해를 낳기도 했다.

이런 와중에도 나는 메인 쇼에서 공개할 한가지 필살기를 준비하고 있었는데 그것은 미리 준비해 놓은 분장용 매력 점을 두 모델의 얼굴에 접착하는 작업이었다. 한 모델은 왼쪽 얼굴 스마일 라인 끝의 보조개 자리에 다른 모델은 오른쪽 얼굴의 같은 위치에 붙여 두 모델의 완벽한 대칭적 형태와 시크한 패션 룩을 동시에 완성하는 화룡점정이었다.

패션 대전의 결선 패션쇼 시작이 임박하자 힐튼호텔 행사장 안은 입추의 여지가 없을 정도의 인파로 가득 찼다. 단일 패션 행사로는 유례없는 3000여 명이란 사상 최대 규모의 관객이 모였으며 일부 지방 도시의 학생들은 버스를 대절해 단체로 참관하기도 했다 하니 행사에 대한 관심과 열기는 실로 대단했다고 하겠다. 내가 속한 아모레퍼시픽 미용연구실에서도 황혜숙 실장을 비롯한 동료 직원들은 든든한 응원군으로 참석해 주었다.

드디어 본선의 막이 올라 패션쇼가 진행되었고 36점의 출품작들은 동시에 한 무대 위에 올려져 심사 위원단과 수많은 관객들의 앞에 공개됐다. 모두 피팅룸으로 돌아와 초조한 마음으로 심사결과가 나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한혜자, 오은환, 정영자 3인의 초대 디자이너 패션쇼가 진행됐고 쇼가 끝난 후 바로 10명의 입상 후보자가 호명되어 무대 위로 나갔다. 환호와 비탄이 교차하는 가운데 내 이름도 포함되어 있었다.

사회를 맡은 김동건 아나운서는 짓궂게도 입상 후보자들에게 살 떨리는 질문을 던져 대회의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피팅룸 안으로 모두 다시 돌아와 대기하고 있자니 곧이어 5명의 최종 결선 수상 후보의 이름이 차례로 호명되어 무대로 불려나갔다. 다시 내 이름도 호명되었다. 무대로 나가니 부산의 최장호 형, 홍익대 대학원의 유영선, 이미경, 그리고 국민대의 이 영란 등 5인의 최종 결선 진출자 들이 수많은 관객을 향해 서 있었다. 김동건 아나운서의 멘트로 은상 수상자인 이미경, 이영란이 먼저 발표되고 남은 3인 중에서 금상 1인이 발표되는 순간 옆자리에 서있던 최장호 형이 덜덜 떠는 모습이 보였다. 최장호 형은 금상 수상으로 호명됐다. 이제 마지막 남은 두 사람 중 영예의 대상 1명이 발표되는 순간이었다. 심사 위원단으로부터 대상 수상자의 이름이 적힌 쪽지를 전달받은 김동건 아나운서는 최종 대상 발표를 잠시 미루고 유영선과 내게 번갈아 가며 짓궂은 질문을 던졌다. 모든 시선이 집중된 가운데 김동건 아나운서는 지금 이 순간 내게 가장 생각나는 것이 있다면 무엇인지 물으며 마이크를 가까이했다. 극도의 긴장감 속에서 나는 시원한 소주 한잔을 생각했다. “소주나 한 잔 쭉 들이키면 좋겠습니다”라고 답하니 좌중은 온통 웃음바다가 되었다. 그리고 드디어 대상이 발표됐다.

영예의 대상은 내 차지였고 참으로 꿈만 같은 행운이 현실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금진호당시 상공부 장관의 치사를 대독한 섬산연의 김각중 부회장의 시상식행사가 끝난 후 축하 리셉션이 진행되는 중에 KBS 보도본부 24시에서 출연 요청이 들어왔다는 전갈이 왔다. 서둘러 여의도 KBS로 달려가 이윤성 앵커가 진행하는 5분간의 생방송 인터뷰를 끝내고 나니 자정이 훌쩍 넘었다. 당시엔 엄한 자정 이후 통행금지법이 있었지만 담당 PD가 내 손등에 찍어준 KBS 도장은 특권적 효력이 있는 것이어서 개포동 내 집에 도착할 때까지 무사통과였다. 늦은 새벽 내생애 너무도 특별한 하루를 보내고 도착한 집안에는 아내와 아내의 절친이며 대학원 동기인 손영희 씨가 축하의 뜻을 담아 차려놓은 소주 한병과 매운 닭발 한 접시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대한민국 패션 대전은 패션에 문외한 이였던 나에게 용기와 자신감을 불어넣어 주었고 글로벌 패션 세상 속으로 나를 인도해준 고맙고도 특별한 매개체였다. 오늘날까지 37년째 지속적으로 개최되고 있는 패션 대전은 한국패션의 세계화를 위해 수많은 한국 대표급 디자이너를 발굴 지원해 오고 있으며 명실 상부한 한국 최고의 신진 패션 디자이너의 등용문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