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규모 메이크업쇼 행사를 마친 우리 모두는 각자의 일상적 업무로 복귀했다. 총 연출을 맡으셨던 배천범 교수님은 몇 개월 후 국민대에서 이화여대로 자리를 옮기시게 되는데 이때 아모레 메이크업쇼 연출은 교수님의 주요 연구실적에 추가됐다. 메이크업 쇼를 함께 고생하며 준비하는 동안 나와 배 교수님의 관계는 더욱 돈독해졌고 곧 이어 또 다른 패션쇼 연출을 맡으신 배 교수님은 내게 다시 일을 맡기셨다. 당시에 나는 이 일이 미래의 내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을 분수령의 시발점이 될 것이란것은 상상도 못하고 있었다.

지난 1983년 메이크업 쇼 직후에 개최된 제1회 대한민국 패션대전의 결선 패션쇼를 위한 메이크업 업무였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백 스테이지에 섞여 일을 하고 있었지만 내 또래의 야심찬 신진디자이너 30여 명과 그들이 출품한 의상 작품들을 바라보면서 나는 스스로 묘한 갈등을 느끼고 있었다. 나도 백 스테이지가 아닌 메인스테이지위에 서고 싶다는 욕망과 이런 정도의 의상 작품은 나도 할 수 있을것 같다는 일종의 질투어린 자신감 같은 것이었다. 게다가 대상 수상자에겐 정부로부터 1년간 해외패션 선진국 유학 특전이 주어지니 신진 디자이너들에겐 꿈을 실현시킬 수 있는 참으로 파격적인 기회였다. 당시는 요즘과 달리 해외여행이 자유화되기 이전의 시절이어서 여권을 받는다는 것 자체도 특별한 일이였다. 제 1회 패션대전 영예의 대상에는 이화여대의 이연희(현 한양대 교수) 우수상에는 국민대의 진성모(전 국민대 교수) 등 5명이 입상해 파리 유학길에 오르게 된다. 나는 무대 뒤에서 대회의 모든 진행과정을 지켜보며 도전의 의지가 끓어오르는 자신을 느끼고 있었다.

회사에서는 코디네이터 업무가 늘어나면서직원 수도 늘어났고 내가 직접 현장을 뛰는 일보다는 컬러나 패션에 관한 글로벌 트렌드의 정보 분석이나 연간 예산 기획과 집행 등을 포함하는 관리역의 비중이 커져가고 있었다. 직급도 과장 대리로 올라 곧 과장으로의 승진을 바라보는 터였다.

이렇게 일상적인 생활 속에 시간은 빠르게흘러 해가 바뀌고 1984년 초가 되자 제 2회 대한민국 패션대전에 관한 응모 공고가 일반에 공개됐다. 3차에 걸쳐 경쟁자를 선별하고 최종적으로 통과된 결선 진출자들에게 결선 패션쇼 무대를 제공해 최종 5명에게 유학의 기회를 공개적으로 부여하는 과정이었다. 참으로 길고도 좁은 관문을 통과해야 하는 치열한 경쟁의 마당이었다. 당시엔 지금처럼 인터넷 접수 같은 시스템이 없었던 시대여서 신세계본점 건너편에 있었던 한국섬유산업연합회 건물 10층으로 직접 방문해 긴 줄을 기다린 끝에 응모접수를 마치고 1차 심사인 드로잉과 맵을 제작 할 규격용지를받아 돌아왔다. 주어진 한 달 남짓한 시간 안에 실물로 제작 할 결선 패션쇼 의상을 규격용지에 드로잉 해서 제출하는 것 이여서 소재와 제작방법 등 디테일한 부분까지 모두 고려되어야 하는 첫 관문이었다.

회사의 업무는 바빴고 시간이 흐를수록 스트레스는 가중되고 초조해지고 있었다. 나의 디자인작업 스타일은 회사에서도 이미 여러 차례수행했던 모든 프로세스와 마찬가지로 목표를 향한 무거운 스트레스 상태에서 좀 지나칠 만큼 오래 생각하고 이 아픈 상태를 즐기다가 마지막 순간에 결정적인 아이디어를 도출해 내는 것이었다. 패션대전 작품 역시 마감일 3일 전이 되어서야 나 스스로 만족할 만한 최종안이 정해졌다. 나는 퇴근 이후에 작업이 가능 했으므로 저녁에 돌아와 이틀 밤을 꼬박 새워 작업한 뒤 마감 당일에야 결국 두벌의 작품 드로잉을 완성시켰다. 검정색 가죽과 울을 함께 사용하는 심플하고 모던한 스타일의 두벌의 원피스는 한 벌로 보면 좌우 비대칭 구조이지만 두벌이 함께 서면완벽한 대칭의 구조로 보이는 디자인이었다.

작품명을 ‘BLACK + BLACK’ 으로 정하고 완성된 드로잉을 제출하기 전에 우선 배 교수님께 보여드리고 평가를 받고 싶었다. 제출 마감 시간이 2시간밖에 남지 않은 상황에서 이화여대로 부지런히 달려가 드로잉을 보여드렸다. 교수님의 평가는 부정적 이었다. 드로잉 상태로만 평가했을 때 무채색이고 장식성이 배제된 심플한 형태의 내 디자인은 여타 화려한 색상과 형태의 디자인과 비교해 틀림없이 약하고 초라해 보였을 것이다. 그리고 배 교수님은 이번 패션대전에서는 패션쇼 연출만 하고 심사는 하지 않기로 했다는 사실을 알려 주셨다. 어찌되었던 간에 마감시간 전에 작품을 제출해야 했다. 소공동 섬산연 건물로 달려가 이미 여러 명이 대기중이던 긴 줄의 끝에 섰고 결국 마감시간인 6시를 훌쩍 넘겨서야 작품을 제출했다.

응모자 수가 지난해의 3배가 넘어 경쟁이치열한 가운데에서도 다행이도 나는 100여 명이 선발되는 1차 심사에 합격통지를 받게됐다.이제 최종 본선 출전자를 뽑는 2차 시험을 준비해야 했는데 그것은 지정된 테마와 소재를 사용하여 스타일화를 드로잉하고 재단까지 완성하는 것이었다. 재단에 자신이 없었던 나는 당시명동에서 재단학원을 운영하던 백혜숙 선생의 지도로 한 달 내내 반복적으로 여성재킷 원형평면제도를 연습했다. 2차 시험은 오전에 스타일화, 오후엔 재단시험이 치러졌고 마지막에 심사위원들의 면접평가가 있었다.

내가 속한 면접장에는 디자이너 진태옥, 코오롱 이호정, 국제패션 신혜순 선생님 등이 면접위원으로 자리하고 있었다. 진태옥 선생님은 내가 패션 디자이너로 활동하게 될 경우에도 아모레퍼시픽이 계속 지원해 줄지의 여부를 물어 보셨다. 바로 대답을 못하고 당황해 하는 내게‘지속적으로 지원을 받으면 더 좋겠는 뜻’이라고 내 대답을 대신 하셨다. 그때의 면접시험상황은 30년 이상 지난 지금까지도 내 기억 속에 생생하다. 거친 패션세상으로 첫발을 내딛는 신진디자이너에게 현실적인 성공을 소망하는 선생님의 마음이었음을 느낀다.

곧 최종 결선에 오를 36명이 발표되어 소집 되었는데 다행히도 나는 그중에 끼어 있었다. 당시 이미실력이 출중한 것으로 알려진 부산 디자이너 최 장호 형, 오늘날 한국 톱디자이너가 된 이 상봉 디자이너 등 전도유망한 쟁쟁한 지원자들이 모두 함께 모였다.

그간 내가 회사에서 수행한 모델 촬영용 의상제작 이력과 메이크업쇼를 통해 얻어진 경험은 있었지만 내 아이디어로 창작된 옷을 내 손으로 직접 꿰매고 완성하는 작업은 난생 처음이었다. 의상 제작은 회사 퇴근 후인 밤에만 진행 되었는데 회사에는 결과를 알 수 없는 이 작업에 대한 내용을 일체 비밀에 부쳤다. 일요일엔 모델을 집으로 불러 온종일 피팅 작업을 진행해 나갔다. 전문 패턴사의 도움을 받아도 해결되지 않았던 어려운 형태의 재단 문제는 두께감이 있는 종이를 커팅하고 이어붙이는 방법을 사용하니 의외로 쉽게 해결되었다.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내 머릿속에 존재하고 있는 옷의 형태와 똑같은 실물을 만들어 내는 것만이 지상 목표였다.

이제 무대에 내 자신과 작품을 올리고 평가받아야 하는 살 떨리는 진검승부는 코앞으로 다가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