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이 되자 나는 여느 날과 다름없이 출근길에서 회사 건물로 향하는 수많은 다른 직원들 틈에 끼어 함께 걸어 들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내 몸속에 가득 차 맴도는 그날 일어날 일들에 대한 기대 섞인 불안감은 마치 내가 그들과 다른 존재가 된 것처럼 느끼게 했다. 마치 나만 외롭게 기약도 없는 미지의 세상으로 여행을 떠나는 사람인 것처럼.

직원들과 오늘 함께해야 할 일 주의사항 등에 대해 부랴부랴 아침 회의를 끝내고 부지런히스테이지에서 사용할 도구들을 챙겨 행사장으로 향했다. 소공동 롯데호텔 크리스털 볼룸 안에는 이미 총연출인 배천범 교수님과 스태프 들이 모두 모여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배 교수님은 조연출인 나의 역할과 함께 메이크업 아티스트로서 무대에 서야하는 역할에 이르기까지 오늘 쇼의 진행에서 분담 할 나의 일들을 세부적으로 지시하셨다. 무대 안과 바깥의 일들, 무대 위에서의 역할들까지 모두 내 일에 포함 되어있었다.

그중에도 메인 콘트롤 박스 바로 밑에 설치되어 컴퓨터와 연결된 24대의 독일제 특수 멀티비젼 프로젝터는 이번 쇼를 특별하게 차별시킬 핵심 장비였다. 직원들과 함께 수개월을 밤새워 심혈을 기울인 작업이었기에 더욱 애착이 컸고 한컷 한컷 모든 장면은 참으로 아름다웠다.

15분 정도 분량으로 프로그램된 영상 자료들 중에 3~4분 여의 한 부분을 예로 들면, 원형무대 뒷벽에 설치된 초대형 스크린에 반짝이는 별들로 가득한 신비한 우주공간의 배경이 점진적으로 나타나고 우측 상단에서 아름다운 황 신혜의 옆모습이 페이드인 되어 떠오른다. 서서히 눈을 떠 입김을 훅 불면 입술로부터 한줄기 신비한 빛이 스크린 반대편으로 쏘아지고 그곳으로부터 아름다운 색상의 수많은 꽃망울들이 서서히 만개하기 시작하면서 전체화면이 채워진다. 영상의 움직임에 맞추어 편집된 음악과 음향효과가 함께 조화되며 느껴지는 감각적 효과는 소름 돋을 만큼 아름다운 것이었다. 스크린 위에 투사되어 보여 지는 슬라이드 동영상의 선명한 색상과 해상도는 당시로는 획기적이였다.

무대 뒤에서는 모든 모델들의 헤어 메이크업과 의상 준비가 분주한 가운데 리허설이 진행되었고 모든 것은 만족스러웠다. 메이크업 쇼리허설은 2번의 동선 리허설과 2번의 착장 리허설 총 4회로 계획 되었다. 3부로 나뉜 이미지 쇼와 봄, 여름, 가을, 겨울 4가지의 메이크업 시연 등 총 7부로 구성된 쇼는 각 무대의 안무와 소품 등의 연출이 달라 일반 패션쇼 리허설에 비해 시간이 많이 소요되고 있었다. 그렇게 세 번째 착장 리허설이 끝나갈 즈음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어처구니없는 사고가 터지고 말았다. 24대의 특수 프로젝터 영상을 제어하는 메인컴퓨터에 프로그램 된 메모리가 일순간 날아가 버린 것 이었다.

크리스털 볼룸의 컨트롤박스 변압기에 연결된 불안정한 전압과의 충돌이 주요 원인이라 하였다. 콘티에 맞춰 DOS 상태에서 수개월간 일일이 작업한 프로그램을 다시 살려내는 것은 당시의 상황에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여러 날을 함께 밤새워 고생하며 작업했던 동료 직원들은 피땀 어린 결과가 일순간에 어이없이 물거품처럼 사라져 버렸다는 충격적 상황에 눈물 흘리며 망연자실해 하고 있었다. 하지만 우리가 살면서 어떤 일을 하던 간에 문제는 크던 작던 항상 발생하게 마련이고 발생되는 문제는 해결해야 하는 법이다. 코앞으로 다가오는 쇼 시간에 맞춰 쇼는 시작 되어야했고 문제는 해결 되어야만 했다. 반쯤 정신이 나가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는 컴퓨터프로그래머에게 다가간 나는 일단 그를 진정 시키고 나서 혹시 있을 수 있는 해결방안을 찾기로 했다.

처음부터 수 개월간 고락을 함께하며 작업을 해왔던 그는 다행이도 영상콘티의 내용을 모두 기억하고 있었고 가능한 부분을 그 자리에서 수동으로 작동시켜 영상을 보여주는 방법이 그나마 유일한 해결책 이었다.
안타깝게도 이전 리허설에서 느꼈던 부드러운 움직임이나 음향과의 완벽한 조화는 불가능해 졌으나 그런 상태로 영상을 보여주는 수밖에 없었다. 최종 결정권을 가진 배교수님께서도 선택의 여지가 없다고 판단하셨다.

드디어 메인 쇼의 시간이 다가오고 특별히 초대된 800여 귀빈들이 속속 입장하고 있었다. 이제 나는 백 스테이지로 들어가 준비된 흰옷으로 갈아입고 메이크업 아티스트로서 무대에 오를 준비를 해야 했다. 이와 동시에 콘트롤 박스에서 총 지휘를 하고 계신 배 교수님의 워키토키 지시에 따라 조연출로서 무대 뒤편의 일을 진행해 나갔다. 당시 최고 인기의 황 인용 아나운서의 사회로 쇼가 진행되고 3부로 구성된 이미지 쇼에 이어 봄,여름,가을,겨울 4 파트로 나뉜 메이크업 시연 무대가 이어졌다.

나는 봄 파트인 첫무대의 메이크업 아티스트 역할을 맡았다. 수많은 관객의 집중된 시선을 받으며 눈 시린 조명 속에 앉아있는 모델을 향해 걸어 나가 얼굴에 메이크업을 시연하는 일은 가슴 떨리는 새로운 경험이었다. 시연이 끝나고 돌아온 백스테이지 안에는 오늘의 주인공인 황신혜를 비롯한 박정옥, 김아현 등의 수많은 모델들 그리고 스태프 들이 여전히 함께 섞여 쇼를 진행하는 중이었지만 내 생각은 온통 문제의 영상이 어찌작동하고 있는지에 모아져 있었다.

무대가 보이지 않는 백 스테이지 안에 갇혀있으니 궁금하고 답답하지만 사실상 더 이상 내가 할 수 있는 것도 없었다. 이제 피날레 스테이지에 모든 출연자들이 함께 오르고 초유의 대형 메이크업 쇼는 나그랑 메이크업 브랜드의 탄생을 세상에 알리며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쇼 이후에는 100여명의 VIP가 별도로 초대된 리셉션 홀로 자리를 옮겨 사장님과 임원들을 비롯한 사회각계의 저명 인사들이 함께하는 칵테일파티가 진행 되고 있었다.

사장님과 임원들께서는 멋진 쇼라며 만족해하시고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다. 특히 까다롭기로 소문난 앙드레 킴 선생님은 우리에게 직접다가오셔서 영상, 음악, 무대 등 모든 것이 너무도 ‘환타스틱’하고 멋진 쇼라며 크게 칭찬해 주셨다. 그리고 그날 밤 선생님의 요청에 따라 무대철수를 보류하기로 했고 우리가 설치한 그 원형무대 위에서 바로 다음날 앙드레 킴 선생님의패션쇼가 개최되었다.

우리가 노력하고 기대한 바대로 멋진 영상연출이 안 되어 속상했지만 다행이 전반적으로 쇼에 대한 평가는 대성공 이였다. 며칠 후 신동관 사장께서는 신라호텔의 식사자리로 우리를 초대하여 노고를 치하해 주시며 기분 좋아하셨다.

지금도 1983년의 나그랑 메이크업 쇼는 ㈜아모레퍼시픽의 사사에 기록되어 남아 있다. 우리를 그토록 애태웠던 슬라이드 영상자료들은 후일 요청에 의해 국민대학교 조형대학 측에 대여되었고 3년 주기로 개최되는 대규모 전국 순회전시인 ‘국민대 조형전’에서 호평을 받으며 사용되었다.

무에서 유를 창조했던 첫걸음인 ‘품의’에서 부터 기획, 디자인, 의상제작, 출연에 이르기까지 6개월여의 전 과정을 배 교수님 밑에서 배우며 피땀 흘려 진행하여 개최한 초대형 메이크업 쇼가 내게 준 값진 경험은 패션 세상속의 나를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다. 객석에 앉아 완성된 것 을 보고 느끼는 수동적 입장이 아닌 무엇인가를 창작하여 만들어 내기위해 전체를 볼 수 있고 기획하는 능동적인 생산자로서의 생각을 내게 갖게 만들어준 것이었다.

이때의 소중한 경험으로부터 생성된 DNA는 후일 내가 교수가 되어 1994년부터 실시한 7차례의 국민대 졸업 패션쇼와 2001년부터 홍익대 대학원에서 실시한 8차례의 홍익 패션비엔날레 하얏트 디너쇼의 컨셉츄얼 스토리 속에 깊게 스며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