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몇 년 사이에 세계적인 디자이너들은 자신의 런웨이 무대에 가방과 구두처럼 모자를 자주 선보여 그야말로 ‘모자 전성시대’다. 특별한 순간에 필요한 패션 액세서리라는 ‘독특함’과 야구 모자처럼 쉽게 쓸 수 있는 ‘일상성’이 충돌하는 가운데, 모자는 이상기후 시대의 파생물처럼 다시 주목받고 있다. 공예와 패션라는 교집합 속에서 무대 의상과 모자를 디자인하는 ‘남큐박밀리너리’의 박남규 디자이너를 만났다.

그의 작업실 ‘박남규모자연구소’는 석계역 근처에 있다. 무더운 폭염 속에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찾아간 그의 작업실에서는 무더위에도 불구하고 모자와 씨름하는 특별한 장인이 있었다. 그가 손님을 위해 시원한 음료수를 준비하는 동안, 사무실을 둘러 봤다. 역시 모자가 사무실 공간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었다. 장인의 손길이 느껴지는 쿠튀르 모자부터 금방쓰고 나가도 될 것 같은 헌팅캡과 챙이 넓은 모자에 이르기까지 마치 작은 모자 박물관을 방불케 했다. 작업실 중앙에 있는 두껍고 커다란 나무책상 위에는 원단 조각과 부자재, 책 등이 어지러이 흩어져 있었다. 최근 영국에서 진행되는 국제 모자 공모전에 낼 모자 작품을 준비하느라 바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디자이너가 직접 갈아 준 시원한 청포도 주스를 마시고 나서 인터뷰를 시작했다. 먼저 어린 시절 꿈을 물었다. 주저 없이 패션 디자이너였다고 말했다. 의아했다. 사실 그의 나이를 따져 볼 때 어린 시절부터 패션 디자이너 꿈을 가지기에는 당시 남자 패션 디자이너에 대한 인식이 약하던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분명한 이유가 있었다. 그의 외할머니가 옷 장사를 하고 있었다고 한다. 시골 옷가게라 남성복과 여성복은 물론 아동복도 팔았다.

그는 어린 시절 방학만 되면 김제에 있는 외할머니집에 가는 것을 좋아했다. 외할머니가 자신을 위해 준비한 옷이 궁금하기도 했지만, 목적은 따로 있었다. 일반적인 개구쟁이들처럼 냇가에서 물장구치고 노는 것보다 외할머니 가게에 앉아 사람들이 옷을 입는 모습을 보는 것이 좋았다. 심지어 아동복은 직접 입어보기도 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어려서부터 엄마에게 패션 디자이너가 꿈이라고 자기 최면을 반복해서 말했다. 사실 패션 디자이너가 된 데는 엄마의 영향도 컸다. 당시 그의 엄마도 사업을 하고 있었는데, 엄마 사무실에서 본 잡지에 나온 이브 생 로랑과 피에르 가르뎅 스토리를 읽으면서이 패션보이의 디자이너에 대한 꿈은 나날이 커졌고 한다.

어릴 때 그림에 남다른 소질이 있었던 그는 자신이 상상하는 멋진 옷을 그림으로 그리기 시작했다. 엄마도 그런 아들을 말리지 않았다. 그의 엄마는 아들이 공부도 잘했지만 그림 잘 그리는 것을 주로 칭찬했다. 아들이 가진 재능을 높이 평가한 셈이다. 엄마는 친구들에게 공부 보다는 그림에 소질이 있는 아들을 늘 자랑했다. 패션 디자이너가 되겠다는 꿈을 가졌던 꼬마는 어느새 대학입시를 앞두게 되었다. 국민대 의상학과 진학을 결심한 그는 고등학교 2학년 방학 때 당시 국민대에 재직 중이던 배천범 교수에게 연락해 개인 면담을 하는 기회를 가졌다. 아버지와 함께 상경해 목격한 교수 연구실은 아트웨어와 아트북으로 가득했다. 패션 디자이너가 되겠다는 꿈은 더 커졌다. 물론 국민대 의상학과가 조형대로 바뀌어 미술 실기를 보는 바람에 뒤늦게 미대 입시 공부를 준비해야 했지만 매 순간이 행복했다.

하지만 꿈이 크면 실망도 큰가 보다. 세계적인 디자이너의 성공 스토리를 읽으면서 꿈을 키웠던 그는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자신의 어릴 때부터 꿈꾸어 왔던 이상과 거리가 멀다는 것을 알고 실망했다. 1,2학년 때 교양 과목이 너무 많았고 전공 과목도 실기보다는 이론이 많았다. 그래서 복장학원을 알아보기도 했지만, 대학 졸업장이 있어야 생각에 다른 학과 의 실기 과목을 많이 들었다.

또한 후배들에게 복종을 강요하고 ‘정예 부대’라며 학과 집단화를 지향하는 일부 권위적인 남자 선배들의 모습도 맘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나이 많은 선배들에게 반항도 했다. 오히려 그에게 영향을 준 것은 후배들이었다. 조형대로 바뀌면서 실기를 잘하는 후배들이 많이 입학했기 때문에 경쟁의식을 느껴 더 열심히 과제를 할 수 있었다. 그는 학생 운동이 치열하던 시절, 머리를 노랗게 물들였고 이상한 옷도 직접 만들어 입었다. 기성복 중에 맘에 드는 것이 없었기 때문이란다.

그러던 중 그는 대학 3학년 때 강사로 출강하는 장광효 디자이너를 운명적으로 만났다. 당시 장광효는 내셔널 브랜드 ‘레드옥스’ 실장이자 자신의 브랜드 ‘카루소’를 막 시작하던 시점이었다. 그는 실기 시간에 현직 디자이너에게 자신의 작업을 검증받고 싶었다. 그래서 준비도 많이 하고 질문도 많이 했다. 과도한 열정과 욕심 때문에 동기들의 뜨거운 눈총을 받기도 했지만, 그런 그를 눈여겨 본 장광효는 3학년 방학 때 ‘카루소’에서 인턴으로 일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다. 대학 4학년 때는 삼성물산에서 진행한, 외국식으로 남자 디자이너를 키우겠다는 소위 글로벌 인재육성 프로그램에 뽑혀 3개월 연수를 받고 3개월간 실무를 경험하기도 했다.

1988년 그는 장광효 디자이너의 추천으로 진태옥 디자이너의 남성복 브랜드 ‘프랑소아즈 옴므’에 면접을 보고 합격해 어릴 적 꿈인 패션 디자이너로 사회 생활을 시작했다. 약 2년 동안 그는 ‘프랑소아즈 옴므’에서 옷에 대한 많은 것을 배웠다고 회상했다. 샘플을 마음대로 만들 수 있도록 디자이너 진태옥이 배려해주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본사에서는 샘플이 더 잘 팔렸다.

그러던 중 일본 출장을 다녀온 진태옥 디자이너는 일본처럼 젠더리스 개념의 셔츠 전문 브랜드를 만들고 싶다며 그에게 런칭 과제를 맡겼다. 덕분에 많은 관계자들을 만나고 자료를 취합해 150벌의 샘플을 만들었다. 하지만 일본의 상황도 좋지 못했고, 국내에서도 너무 앞서간 것으로 판단되어 브랜드 전개는 보류되었다. 런칭 때문에 남성복 디자이너에서 빠졌던 그는 결국 여러 가지 사정으로 ‘프랑소와즈 옴므’를 그만두고 셔츠 시장 조사 때 만난 지인의 투자를 받아 지난 1991년 남성복 브랜드‘베오그라드’를 런칭하고 어린 나이에 디자인실장이 되었다.

홍서범, 이주엽 등 남자 연예인들이 주요 고객인 베오그라드는 나름대로 장사가 잘되었다. 정통 남성복 보다는 유니섹스 캐주얼에 가까웠다. 연예인을 상대로 하다 보니 무대 의상에[ 대한 관심도 생겼다. 하지만 일반인들이 경우 샘플을 많이 만들었지만 키가 작고 나이도 많다 보니 수정사항이 많았다. 마치 디자이너라기보다는 수선 서비스를 하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더 큰 고민은 자신이 디자인한 옷을 입은 고객을 거리에서 만나면 창피하게 느껴졌다. 결국 고민 끝에 남성복 디자이너에서 무대 의상 디자이너로 진로를 바꾸기로 결심했다.

대학 때부터 연극 동아리 활동 무대 의상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전문적으로 공부하기 위해 유학을 떠났다. 평소 존경했던 디자이너 비비안 웨스트우드가 활동하는 영국으로 떠나 1992년 ‘윔블던 스쿨 오브 아트’에서 무대 의상을 전공했다. 작업을 진행하면서 그는 주로 무용 쪽에 포커스를 맞추어 작업을 하면서 무대 장치도 함께 배웠다. 독특한 무용수 옷을 만들다 보니 학교에서도 졸작 때 전시보다는 윔블던 시어터 무대에 직접 작품을 올리자는 제안을 받았고 결국 단독으로 진행된 졸작 공연은 호평을 받았다. 졸업 후 1~2년 동안 뮤지컬 의상을 만드는 등 영국에서 활동하다가 1996년 귀국했다. 귀국 후 주로 무용수들을 위한 티셔츠와 속옷 등을 판매하는 클럽웨어 ‘D.O.B’ 매장을 홍대 앞에서 운영하면서 대학로 아르코와 예술의 전당에서 무대 의상을 작업했다. 또한 국민대, 경북대, 서일대, 중앙대에서 시간 강사로 출강하기도 했다.

그 역시 IMF 여파를 피해갈 수는 없었다. 공연도 많이 없어지고 매장운영도 힘들었다. 그러던 중 영국 극단 ‘스테이트 오브 스페이스’에서 전속 무대 의상 디자이너 제안이 들어왔다. 결국 1999년 다시 한국을 떠나 영국에서 뉴밀레니엄을 맞이했다. 3년간 일한 후 2003년부터 옥스퍼드에 있는 극단본부에서 무대 의상 디자이너로 일하면서 시민권을 신청했다. 이후 영구권이 나오자 마자 옥스퍼드를 떠나 런던에 있는 캐주얼 브랜드 ‘마티닉(Matinique)’에 입사했지만 1년 6개월 후 중국에서 아웃소싱을 담당하라는 제안을 받고는 회사를 그만두었다. 이후 프리랜서로 무대의상을 만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화려한 옷에 모자를 쓰고 모임에 갔는데, 모자를 안 썼을 때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관심을 보였다. 이때 그는 영국에서 남에게 어필하기 위해서는 모자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인식했다. 결국‘켄싱턴 & 첼시 컬리지’에 입학해 모자 디자인을 공부했다. 공부를 하면서 안 사실이지만 모자는 패션이 아니라 텍스타일로 구분되었다. 졸업 후 2008년 에드위나 입봇슨 밀리너리(Edwina Ibbotson Millinery)에서 모자디자이너로 일한 후 2009년에 자신의 이름을 건 ‘남큐박밀리너리(Nam Q Park Millinery)를 런칭했다. 모자를 디자인하면서 상도 많이 받았다. 2008년에 피터 존스 애스콧 컴피티션에 입선을 했고, 같은 해 팰트 모자디자인 콘테스트에서 3위에 올랐다. 2011년에는 올해의 모자 디자이너에 뽑히기도 했다.

2010년 그는 런던 생활을 정리하고 10년 만에 귀국했다. 그는 한국에서 다양한 개인전과 공연용 모자 제작을 통해 우리의 기술이 일본보다 낫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고 싶었다. 그래서 모자를 상업적인 실용성보다는 문화적으로 접근했다. 디자이너가 만들면 티셔츠와 청바지 가격이 올라가듯이 모자도 디자이너가 만들면 고가에 판매될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아직 그 희망 사항은 현재 진행형이다. 지금도 그는 디자이너의 컬렉션을 통해 콜라보레이션으로 모자를 선보이거나 전통적인 소재를 모던한 모자로 변주해 전시하는 등 한국 모자의 고급화를 위해 애쓰고 있다.

특히 그의 귀국에 영향을 미친 것은 후학 양성이었다. 런던에서 모자브랜드를 전개할 때 한국 출신 아르바이트생을 썼는데 확실히 외국인들 보다 손재주가 뛰어났다. 그림으로 그릴 수 없는 모자는 모두 샘플을 만들어야 하기 때문에 정교함이 필요하다. 그런 점에서 한국 학생들은 탁월한 실력을 보였다. 외국의 모자 디자이너들도 한국 아르바이트를 쓰고 나면 계속 부탁을 할 정도였다. 그는 앞으로 한국을 대표하는 디자이너가 나올 수 있다는 꿈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한국의 상황은 여전히 힘들다. 모자를 전문으로 가르치는 학교도 없고 매장도 변변한 것이 없다. 한국에서 모자는 쉽게 만날 수 있는 패션 액세서리일 뿐 모자에 의미를 담는 것은 아직 시기 상조다. 즉 모자를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것은 로얄 패션으로 인식하고 있다. 하지만 모자에 대한 그의 열정은 50대에 접어든 지금도 여전히 뜨겁다.

그는 특별한 모자를 만들고 싶다고 말한다. 그가 생각하는 모자는 공예와 디자인이 합쳐진 개념이다. 따라서 고급 모자에는 디자이너의 아이디어 즉 작가 정신이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은 개인 맞춤형으로 모자를 만들어야 개성을 강조할 수 있다고 밝혔다. 우리 전통에도 모자는 많다. 삿갓이나 야바위 등 한국적인 헤리티지는 반영하되 제품을 모던하게 만드는 것이 목표다. 결국 특별한 소재가 특별한 모자 해결 방안이다. 때문에 틈틈이 시장을 다니면서 색다른 한국적인 소재를 찾고 있다. 또한 지난 2014년부터 세종글로벌지식교육원 패션전공 지도교수로 재직하며 후진을 양성하고 있다.

현재 한국에서 공예라는 개념은 너무 무겁다고 말하는 그는 공예적인 측면에서의 모자는 헤리티지와 창의성이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기성복과 무대 의상을 거쳐 모자를 선택한 그는 무대 의상과 모자가 만나는 판타지를 꿈꾸고 있다. 그에게 모자는 쓰는 것이 아니라 입는 개념이다. 입는다는 개념에는 ‘세컨드 스킨’이라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다. 정체성이 옷으로 발현되듯이 모자 역시 TPO에 맞게 특별한 정체성을 만들어 내는 변신의 액세서리라는 것이다. 모자를 통한 문화적 해석을 추구하는 그의 열정은 폭염에도 불구하고 작업실에서 뜨겁게 불태우고 있다. 그의 판타지 아트 모자를 쓴 배우들을 공연장과 레드 카펫에서 자주볼 수 있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