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패션계에 돌연히 나타나 주목을 받았던 디자이너 이도이가 새로운 도전에 나섰다. 하지만 지금까지 걸어왔던 패션 디자이너의 길과 전혀 상관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 모두 것을 포괄하는 개념이다. 즉 패션과 푸드, 파티 등 라이프 스타일에 관련된 다양한 분야를 다루는 크리에이터로 패션을 확장시키는 행보가 주목받고 있다.

자신만의 독특한 색깔로 늘 유쾌한 쇼를 선보였던 디자이너 이도이가 2년 전부터 컬렉션을 하지 않으면서 그녀의 행보에 대한 궁금증이 있었다. 최근 만나 인터뷰한 그녀는 디자이너일 때의 힘들고 심각한 표정보다는 그 어느 때보다 밝고 유쾌했다. 진로를 수정했기 때문이다.디자인실에서 혼자서 고민하던 모습이 아니라 소비자들과 소통하는 창의적인 ‘크리에이터’로 변신했다.

보통 패션 디자이너들은 ‘아인덴티티’라고 불리는 내면의 세계에서 디자인을 뽑아낸다. 1년 전부터 시작해 6개월 전에 패션 쇼를 선보여야 하기 때문에 직감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마케터는 다르다. 그들은 외부에 정보를 얻고 이를 토대로 효율적으로 일을 진행한다. 이도이 디자이너는 감보다는 분석 툴을 가지고 숫자로 이야기하는 요즘 마케팅의 핵심을 간파했다. 최근 2년 동안 중국 드라마 의상 감독, 뮤직비디오 작업, 카페 디자인과 메뉴 개발, 소셜 미디어 컨텐츠 개발 등의 작업을 전개한 그녀의 팔방미인 기질은 이미 어린 시절부터 시작되었는지 모른다.

그녀는 어린 시절 원피스에 대한 집착이 강했다. 원피스를 한번 입으면 절대 벗지 않아 어른들을 힘들게 했다.

어린 시절 결핍이 가져다준 자연스러운 소유욕이었다. 부모가 너무 일찍 결혼한 20대 초반의 가난한 의대 학생 부부였기 때문에 그녀는 친할머니 손에서 자랐다. 덕분에 혼자 놀기의 진수를 스스로 깨우쳤다. 동화책을 읽고 공주가 되는 꿈을 꾸는 것은 기본이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동화책 읽기는 인형 놀이로 발전되었다. 그 인형 놀이는 고등학교 때까지 이어졌다. 돌이켜보면 독서와 인형 놀이는 그녀의 패션 인생의 비타민이었다.

특히 젊은 아빠는 딸에게 인생에서 가장 큰 선물을 주었다. 한글을 가르쳐 준 것이다. 혼자 있어야 할 시간이 많은 딸이 책과 친해지도록 한 아빠의 배려였다. 어쨌든 그녀는 3살 때부터 책과 친구가 되었다. 덕분에 지금도 밥은 안 먹어도 매일 책은 꼭 읽는다. 그녀에게 책은 마음의 양식 이상이다. 혹자는 종이 시대는 한물갔다고 말한다. 하지만 종이가 주는 편안한 촉감과 커피 향만큼이나 깊은 종이 냄새는 일상에 찌든 그녀의 육체를 무장 해제시키고, 창의적인 두뇌 플레이에 마모된 영혼을 목욕시킨다.

1994년에 그녀는 계명대 서양학과를 입학했다. 어릴 때부터 그림 그리기를 좋아해 서양화과를 들어갔지만 2%가 부족했다. 남모를 갈증이었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대학 졸업 때까지도 몰랐다. 단지 뭔가 새로운 환경에서 창조적인 작업을 하고 싶었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런던 유학이었다. 1997년 영국 블레이크 칼리지에 입학해 수석으로 졸업했다. 처음에는 어학연수를 받기 위해서 런던에 갔지만, 포트폴리오 수업을 들으면서 패션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어느새 패션은 그녀에게 설래임으로 다가왔다. 자신만의 포트폴리오를 만들어 패션 명문인 센트럴 세인트 마틴에 도전했다. 경쟁률 140:1. 합격을 꿈꾸기엔 너무 높은 경쟁률이었다. 하지만 최선을 다했고, 결과는 합격이었다. 순수 미술을 전공했던 백지 같은 창의력에서 나오는 무궁무진한 상업적 가능성에 학교가 후한 점수를 주었다. 1998년 센트럴 세인트 마틴에 입학해 패션디자인과 니트웨어 학사학위를 취득했고 2002년 졸업 패션쇼에서는 베스트 10에도 선정됐다. 이를 통해 자신이 진짜 하고 싶었던 일이 패션이고, 자신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도 패션이라는 것을 스스로 깨우쳤다.

런던의 교육 시스템은 그녀와 잘 맞았다. 어떻게 만드는가보다는 무엇을 만들 것인지를 고민하게 만들었고, 무엇을 만들까보다는 왜 만드는가를 생각하게 하는 수업 방식은 늘 새로운 무엇인가를 요구했다. 한국에서 대학을 다닐 때 느꼈던 2% 부족함이 자연스럽게 해소되었다. 학생들의 학점을 게시판에 공개하고 졸업생 숫자를 관리할 정도로 엄격한 학사관리는 그녀의 도전 욕구에 기름을 부었다. 어차피 늦게 시작한 패션이지만 최고가 되고 싶었다. 전 세계에서 모인 패션 영재들과의 무한 경쟁을 하면서 한국인으로서의 세포 하나하나가 살아 꿈틀거리는 느낌을 받을 때가 많았다.

육체적으로 힘들다는 생각은 전혀 없었다. 다만 원하는 대로 결과물이 나오지 않거나 남들과 비교해 자신의 작업이 좀 떨어진다는 느낌을 받을 땐 참을 수 없이 힘들었다. 그런 그녀의 방황을 잡아 준 것이 선생님들이었다. 자신만의 끼를 찾아 노력하는, 멀리 한국에서 날아온 학생을 교수들이 그냥 지나칠 리 없었다. 잘한 부분에 대해서는 교수들의 칭찬이 이어졌고, 못한 작업에 대해서는 진솔한 꾸지람도 병행되었다. 칭찬이 고래를 춤추게 한다는 사실을 직접 경험했다. 칭찬을 들으면 그동안의 피로가 한방에 풀리면서 무엇인가 보상받은 느낌도 들었다. 런던에서 공부하며 들은 교수님의 칭찬은 그녀에게 한잔의 카페라떼처럼 달콤하고 따뜻했다.

그녀에게 런던은 실험실과 같은 존재였다. 무엇을 상상하던 그 이상이 결과물을 만들 수 있는 환경이 너무 좋았다. 특히 아카데미즘과 커머셜리즘이 조화를 이루는 환경은 그녀의 숨어있는 재능을 끄집어내기에 최고였다. 특히 학교 근처의 다양한 서점은 그녀에게 ‘발상의 보고’였다. 세계 각국의 패션 & 예술 출판물이 모여 있는 책방에서 그녀는 어린 시절 동화책을 읽던 소녀처럼 패션에 대한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센트럴 세인트 마틴을 졸업한 그녀가 첫발을 디딘 직장은 학교 선배인 존 갈리아노의 회사였다. 그곳에서 1년간 일하면서 갈리아노만의 창의적인 에너지와 패션 아우라를 배웠다. 이어 겐조에서 3년간 일했다. 겐조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인 안토니오 마라스는 그녀에게 직접 스카우트 제의를 할 정도로 그녀의 실력은 이미 젊은 디자이너들 사이에서 높게 평가되고 있었다. 센트럴 세인트 마틴에서 만난 전 세계에서 온 패션 영재들로 이루어진 든든한 인프라 덕분이었다.

4년간 럭셔리 하우스에서 일하면서 그녀는 ‘진정한 럭셔리 지성’에 대한 화두에 봉착한다.더불어 하이 엔드 패션의 방향성도 함께 고민했다. 결론은 스스로 부딪혀 가면서 하나씩 깨우치는 수밖에 없었다.

그녀 역시 유럽의 다른 젊은 디자이너처럼 파리에서 자신의 이름을 건 브랜드 ‘도이 파리스’를 론칭했다. 자신이 입고 싶은 옷을 만들고 싶었다. 왠지 잘 팔릴 것 같은 느낌도 들었고 자신감도 충만했다. 그녀는 유행과는 거리가 있는 옷을 디자인했다. 너무 특이해서 옷장에 잘 넣어 두었다가 특별한 날에 입고 싶은 옷이 그녀가 만들고 싶었던 옷이었다. 즉 보헤미안적인 삶을 추구하는 보보스족이 그녀가 추구하는 고객이었다.

파리에 매장을 오픈한 1년 만에 그녀는 서울컬렉션을 통해 한국에 처음 이름을 알렸다. 블랙 & 화이트 등 모노 톤 일색인 컬렉션에서 반짝임과 다채로운 프린트로 여성스러움을 발산하는 그녀의 패션은 당시 서울컬렉션의 군계일학이었다. 누구나 생각하고 있었지만 시도하지 못했던 섹시 페미니니티 컨셉을 고급스럽게 살려낸 그녀의 도전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결국 해외 바이어들의 주목을 받았고 매 시즌 컬렉션마다 아이덴티티가 확실한 자신만의 패션을 선보이며 중견 디자이너로 서서히 토대를 닦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2년 전부터 그녀는 패션쇼를 진행하지 않았다.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변신했기 때문이다.

그녀가 크리에이터로 변신한 계기가 된 것은 중국 드라마의 의상 감독 제안을 받은 2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물론 그 드라마는 무산되고 지금은 다른 중국 드라마의 의상 감독을 맡고 있지만 당시 제안은 그녀의 모든 것을 바꾸어 놓았다. 중국 드라마 의상 감독을 맡은 그녀는 드라마의 캐릭터를 분석해 그에 맞는 코스튬을 총괄한다. 본인이 디자인하는 것도 있고 시장에서 사는 것도 있고 다른 디자이너가 디자인하는 것도 있다. 의상 감독을 진행하면서 창의력과 컨템포러리 감성이 필요한 이 일이 자신에게 잘 맞았다.

그녀가 2년 전까지 진행했던 컬렉션도 창의력이 요구되지만, 패션쇼에 들어가는 비용이 1~2억원이 들었다. 하지만 중국 드라마 의상 감독은 큰 자금이 필요하지 않았다.

순간 그녀는 고민에 빠지게 되었다. 자신이 1년에 두 번씩 큰 돈을 들여 패션쇼를 선보이는 것이 과연 옳은 선택일까라는 근본적인 고민이었다. 하지만 창의적인 일을 하면서도 홍보도 함께 할 수 있는 드라마 의상 감독은 뿌리칠 수 없는 유혹이었다. 며칠 간의 고민 끝에 그녀는 국내 컬렉션을 포기하고 중국 드라마 제작사의 달콤한 제안을 받아들였다.

드라마 의상 감독을 맡고 나서 그녀는 처음에 비즈니스적인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하지만 중국 드라마의 PPL은 보통 2~10억의 돈이 오가는 또 다른 마켓이었다. 모든 것이 세분화되어 있었다. 드라마 의상을 총괄하는 그녀는 배우들이 입을 옷 뿐 아니라 액세서리를 넣고 싶은 대로 넣을 수 있었다. 이미 중국에서 드라마로 인기를 얻은 한류 감독이 드라마를 진행 중인데 그는 드라마를 상업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다양한 방법을 알려주었다.

컬렉션과 드라마 의상 감독을 병행해도 되는데, 컬렉션을 중단한 이유가 궁금했다. 그녀는 그 첫 번째 이유로 컬렉션을 상업적으로 연결하기 위해서는 큰 자본력과 시스템이 필요했다. 하지만 그녀 혼자 사업을 시스템화 시켜 스스로 굴러가는 상황을 만들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요즘 사람들은 4차 산업 시대 이야기를 하는데 자신만 2차 산업 시대에 남아 있을 것 같은 불안감도 들었다. 성공 가능성을 엿볼 수가 없었다. 50살, 60살까지 이렇게 일을 해야 한다면 자신이 투자하는 것이 비해 너무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 번째 이유는 다른 디자이너들은 옷도 좋아하고 철학도 있지만, 자신에게는 그런 것이 좀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보통 디자이너들은 옷을 통해 창의력을 발휘하지만, 그녀에게 옷은 스스로 하고 싶은 창의적인 작업을 가로막는다는 생각을 했다. 그녀는 창의적인 옷보다는 콜라보레이션을 통한 창의성이 더 자신에게 맞는다는 판단을 했다. 다이나믹한 드라마를 하면서 더 재미있고 다양한 분야가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세 번째 이유는 크리에이티브를 지향하지 않으면 사람들이 관심이 없어지고 상업적인 것을 쫓다 보면 시간과 돈이 많이 들어가는데, 이 두 가지를 함께 하기에 시간과 힘이 너무 많이 들었다. 패션 쇼를 거창하게 하고 라인을 만들면 1억 이상이 드는 상황에서 혼자 감당하기에는 너무 힘들었다. 그런데 중국 비즈니스는 큰돈을 들이지 않아도 마케팅이 되고 다른 사람들과 비즈니스로 연결되기 때문에 의상을 계속하기 위해 이러한 방법도 가능하다는 것을 알고는 후회 없는 선택을 했다.

그녀는 중국 드라마 의상 감독 외에 뮤직 비디오도 진행 중이다. 비주얼 총괄 디렉터로 앨범 커버 디자인, 전반적인 비주얼, 코스튬 디자인 등을 통해 패션너블한 뮤직 비디오를 작업하고 있다, 크리에이터로 활동하다 보니 그래픽 디자인에 대한 부족함을 느껴 다시 공부하고 있다. 현재 컬렉션을 진행하지 않기 때문에 공부할 시간이 많이 늘었다.

그녀는 카페도 운영 중이다. 경주 감포 바닷가에 위치한 카페 샤갈이다.특히 카페 리모델링은 그녀가 크리에이터 활동에 대한 필요성을 느끼게 된 계기가 되었다. 처음 카페를 시작할 때 전문가에서 세팅을 맡겼는데 기초 세팅이 잘못되었다. 결국 그녀가 투입되어 리뉴얼 작업을 진행했다.메뉴도 다시 짜고 카페 디자인도 다시 하면서 아직 활성화되지 않은 바닷가 카페를 마케팅으로 유명하게 만들 수도 있다는 자신감도 생겼다. 카페를 오픈하면서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유럽에 있을 때 먹었던 맛있는 것들, 살면서 경험했던 것들이 그대로 녹여냈기 때문이다.

현재 그녀의 사무실은 성수동에 있다. 유동인구가 많지만, 디자이너 브랜드가 3층으로 고객들을 유입시키는 것은 힘이 들었다. 그래서 대중이 알만한 브랜드를 병행 수입해 ‘도이도이한 플리마켓’을 진행 중이다. 중국에 드라마 때문에 출장을 갈 때 마다 그녀 옷을 보고 ‘도이도이하다‘라는 말을 많이 들어 이름을 그렇게 지었다. 그리고 가끔 근처 카페에서 게릴라 플리마켓을 진행해 인기가 좋은 편이다.

어쨌든 2년 동안 그녀에게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그녀의 독특한 컬랙션을 런웨이에서 볼 수 없다는 아쉬움은 있지만 크리에이터로 그려나갈 다이나믹한 그녀의 드라마와 카페, 뮤비 등은 비주얼적인 감동을 줄 것으로 보인다. 컬렉션만 중단한 것이지 옷과 완전히 결별한 것은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또 다른 형태의 라이프 스타일 패션을 만날 수 있게 되었다.